소련 코시긴과 중국 교환원의 대화...
키신저의 경고...


[중소분쟁]
[중국][소련]
[코시긴][주은래]
[드골]

다음은 중소 국경분쟁이 한창이던 시절의 일이라 한다.

1969년 3월 2일, 중소 갈등이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로 비화했다.

중국군이 연해주 다만스키 섬(전바오 섬)에 계회적으로 매복하여 30여명의 소련 군인을 사살했다. 이튿날, 모스크바 중국 대사관 앞에는 격렬한 항의 시위가 있었다. 베이징에서는 새로운 차르를 무너뜨릴 것을 촉구하는 대중 선전 공세가 이어졌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1969년 4월, 소련총리 알렉세이 코시긴이 모스크바와 베이징간의 핫라인을 통해 마오와의 통화를 시도하자, 중국 교환원이 연결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수정주의자이다. 따라서 나는 당신에게 연결해 줄 수 없다."

다음날 코시긴이 "그러면, 주은래 총리와 연결해 주시오"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중국 교환원은 다시금 그가 수정주의자라 비난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출처- Tyler, Patrick, A Great Wall: Six Presidents and China,  Public Affairs (September 5, 2000),p.60]


1969년 1월 20일 대통령에 취임한 러처드 닉슨은 “미국이 베트남이라는 진흙탕에서 빠져나오는데 중소 갈등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이 문제 해결의 단서를 제공한 것은 프랑스의 드골이었다. 그 해 2월에 엘리제 궁을 방문한 닉슨에게 드골은 중소갈등이 데탕트를 위한 호기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드골은 중소 갈등이라는 상황에서, 소련은 중국과 서양을 동시에 적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공산주의 진영의 두 거인이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바로 이 때가 둘 중 어느 한쪽과 화해하기 좋은 시기라는 분석이었다.

프랑스의 드골은 이미 이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 중이었다.

드골은 이미 대만의 장개석과 관계를 단절하고, 1964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드골은 중국이 앞으로 외교판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전망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프랑스는 소련과 단교하지 않고, 두 강대국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참고- 랑글레, 프랑수아, 제국의 전쟁 -중국 vs 미국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소와당, 2012,p.33]
by 파리13구 | 2016/01/07 14:05 | Le monde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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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바탕소리 at 2016/01/08 13:07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진짜예요? ㅋㅋㅋ
Commented by 파리13구 at 2016/01/08 1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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