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마거릿 맥밀런 Margaret MacMillan


<우에서 좌로
브레진스키(국가안보 보좌관), 카터, 밴스(국무장관)
1977년>
[미국]
[외교정책]
[소련정책]
[카터][브레진스키][밴스]
제임스 펠로우스에 따르면, 지미 카터 정권의 대소련 정책은 혼란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정권 내부의 대소련 정책결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국무부 장관과 국가안보 특별보좌관간의 대립 때문이었고, 이 대립을 적절히 중재하지 못한 카터의 무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카터 정권의 국무장관이었던 사이러스 밴스 Cyrus Vance 는 소련과의 협상 및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즉 온건 협상파였다. 따라서 밴스는 대소련 강경파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Zbigniew Brzezinski (국가안보 특별보좌관)과 자주 충돌했다. 밴스는 소련과의 제2차 전략무기감축협정 타결을 위해 노력했고, 이것이 카터 정권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파악했다.
펠로우스에 따르면, 소련 정책에 대해서 밴스와 브레진스키가 충돌하는 가운데, 카터는 다음과 같은 우유부단함을 보였다고 한다.
카터 정권의 소련 정책의 혼동을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사례는 1978년 6월의 해군대학에서의 카터 연설이었다. 이 연설의 원래 목적은 정권의 소련 정책을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연설 이전까지의 카터의 소련정책은 밴스와 브레진스키간의 대립 때문에 흐리멍텅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즉 카터 정권 안에, 소련에 대한 두가지 입장이 공존했다는 것이다. 전략무기협정을 강조하는 밴스와 소련에 대한 호전성을 보이는 브레진스키의 소련관이 충돌하고 있었다.
연설문 작성을 위해서, 밴스는 대통령 연설에서 국무부의 소련 정책을 설명해야 한다는 메모를 카터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카터는 이에 동의하고, 브레진스키와 앤드류 영(유엔 대사), 스탠필드 터너 Stansfield Turner (CIA 국장) 및 다른 외교 참모들에게 이 메모를 회람시키고, 연설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작성된 카터의 최종 연설문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밴스의 메모에 브레진스키의 메모를 '짜깁기'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메모들간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연설문의 중간에 명백한 흐름의 단절이 확인되었다. 마치 전혀 다른 영화의 필름을 이어붙인 것처럼 말이다. 연설문을 미리 검토한 한 기자가 평하기를, 카터의 연설은 밴스식의 화해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시작했다가, 브레진스키 메모 부분으로 넘어가면서 "이젠 소련과 전쟁이다!"라는 식으로 끝난다고 했다.
다음 날, 워싱턴 포스트지의 1면 제목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연설"이었는데, 이는 카터 연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었다.
참고-
제임스 펠로우스 JAMES FALLOWS, The Passionless Presidency -The trouble with Jimmy Carter's Administration
The Atlantic, May, 1979
링크- http://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1979/05/the-passionless-presidency/308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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