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과 트루먼의 역사인식? Le monde

메테르니히,100년의 유럽 평화를 설계하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위에 있는 격언
-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냉전]
[한국전쟁]
[봉쇄정책]
[한국전쟁]
[뮌헨협정][유화정책]

1938년 9월 30일의 나치와 서유럽간의 뮌헨협정이 1950년의 한국전쟁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역사가 제프리 리코드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1950년 6월 25일의 북한의 남한 침략을 소식을,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주의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휴가 도중에 접했다. 그는 워싱턴으로의 즉시 복귀를 결정했다.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전직 포병장교이자, 잡화상인, 상원의원,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북한 침략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동원했다. "나는 비행기안에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라고 그는 회고록에 적었다. "나의 세대에게, 이는 첫번째가 아니었다. 강자가 약자를 공격하는 것 말이다. 나는 과거 사례들을 떠올렸다 : 만주국, 에티오피아,오스트리아. 나는 매번 민주주의가 적절하게 대응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민주주의의 실패가 침략자들이 더 막나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트루먼의 판단은 다음과 같았다 : "한국에서의 공산주의의 책동은 10,15,20년전에 히틀러,무솔리니, 그리고 일본놈들이 자행했던 짓거들과 유사하다. 나는 만약 남한이 끝장난다면,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우리 미국 해안의 근처에 있는 나라들을 유린하도록 용기를 줄 것이라 확신했다." 결국 "이는 제3차세계대전을 의미하게 될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유사한 사건들 때문에 유발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트루먼은 "정부와 국가와 관련된 모든 현재적 사건들은 과거에서 비교대상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에게 영향을 주는 결정을 충동적으로 내려서는 안된다"고 결론내렸다. 그런 결정을 위해서는 역사적 근거가 있어야했고, 당시에 알려진 사실에 대한 주의깊은 판단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트루먼에 따르면, "역사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일국의 지도자라면 자국의 역사 뿐만아니라 다른 강대국의 역사에도 정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도자라면 이런 역사의 교훈을 자신이 내려야만 하는 결정을 내리는데 적용할 줄 알아야만 한다."

따라서, 트루먼은 1930년대 역사의 교훈을 한국전쟁에 적용했다. 특히, 남한을 방어하기 위해 개입할 것인가를 문제를 위해서 말이다. 싸우기로한 그의 결심은 나치의 침략과 공산주의의 침략을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그가 인식한 덕분이었고, 이는 미국 대외정책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트루먼의 결심이 미국의 냉정전략인 봉쇄정책을 무장화시켰고, 그 무대를 유럽에서 아시아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이는 15년 이후의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라는 신중치 못한 개입을 위한 빌미를 제공했다.

North Korea’s invasion of South Korea on June 25,1950, caught President Harry Truman vacationing in his hometown of Independence, Missouri. He ordered an immediate departure for Washington.
On the plane ride back to the White House, the former artillery officer, 
haberdasher, senator, and vice president employed his considerable knowledge of history to interpret the meaning of the North Korean attack. “I had time to think aboard the plane,” he recounted in his memoirs. “In my generation, this was not the first occasion when the strong had attacked the weak. I recalled some earlier instances: Manchuria, Ethiopia, Austria. I remembered each time that the democracies failed to act it had just encouraged the aggressors to keep going ahead.” Now, Truman reasoned, “Communism was acting in Korea just as Hitler, Mussolini, and the Japanese had acted ten, fifteen, twenty years earlier. I felt certain that if South Korea was allowed to fall Communist leaders would be 
emboldened to override nations closer to our shores.” Ultimately, “it would mean a third world war, just as similar incidents had brought on the second world war.”1
Long before he became president, Truman recalled, he had realized “that almost all current events in the affairs of governments and nations have their parallels in the past,” and had concluded that “
no decision affecting the people should be made impulsively, but on the basis of historical background and careful consideration of the facts as they exist at 
the time. History taught me,” continued this president well read in history “that the leader of any country... must know the history of not only his own country but of all the other great countries, and that he must make the effort to apply this knowledge to the decisions that have to be made.
 
Thus, Truman applied the history of the 1930s—more specifically, what he perceived to be the lessons of the 1930s—when deciding whether or not to defend South Korea. His decision to fight was virtually dictated by the parallel he saw between Nazi and communist aggression, and it had enormous consequences for American foreign policy. It militarized the U.S. Cold War strategy of containment and extended it from Europe to Asia, setting the stage for the ill-advised U.S. intervention in Vietnam fifteen years later. 

출처-

Jeffrey Record, Making War, Thinking History: Munich, Vietnam, and Presidential Uses of Force from Korea to Kosovo ,  US Naval Institute Press (March 1, 2002), 1-2.



-만약 북한 김정은이 제2의 전면적 남침을 노린다면, 이 남침을 보고 미국 백악관이 어떤 역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논리적일까?

그것은 바로 베트남,아프가니스탄,이라크를 연상시키는 것이 되야 할 것이다.

만약 내일 북한이 한국을 침략한다면, 오바마도 뮌헨협정과 한국전쟁의 교훈을 떠올리며 무력 개입을 결정할까, 아니면 베트남,아프간,이라크의 악몽을 떠올리며, 개입을 주저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어떤 역사적 교훈이 오바마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오바마의 역사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결국, 미국 대통령의 역사관을 파악하는 것이 한국 안보와 직결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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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발발과 트루먼의 역사인식? | SSS.WIKI 2015-07-27 21:4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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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노무현의 자주지향 2015/07/27 19:47 # 답글

    김일성이 무슨 근거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 장담했을까요?
  • 노무현의 자주지향 2015/07/27 20:31 # 답글

    사전배치전단 등을 볼 때 거의 자동으로 개입한다고 보면 될 겁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5/07/29 19:36 # 답글

    저 윗 덧글의 솔까역사(닉네임을 자주 바꿈.)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애초 50년 6월 이전으로 돌아가보면 나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법한 이유가 많았습니다. 일단 미국이 꾸준히 국방예산을 삭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국방예산 삭감은 국방예산에 부정적인 트루먼 뿐만 아니라 의회조차 강력히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국공내전당시 결국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즉 미국이 개입가능성을 낮게 봤습니다.
    또한 개입한다고 해도 그 결정이 늦거나, 결정을 한다고 해도 미군 파견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습니다.(당대나 지금이나 대규모 정규군이 그렇게 신속히 먼 지역까지 파견되긴 어렵습니다. 괜히 미국의 스트라이커 여단이 정규군 파견에 앞선 신속파견을 목적으로 창설된게 아닙니다.) 즉 미국이 개입해도 전세를 뒤집기 어렵게 밀어붙이면 결국 미군이 개입해도 승산이 있다고 봤죠.

    물론 아시다시피 크루먼은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사주를 받은 행위로 봤고 이것은 공산주의의 도발로 봤으며 다른 지역을 공격하기 위한 기만행위이자, 양동작전 아닐까 했습니다. 트루먼은 이란에 대한 양동작전을, 에치슨은 대만에 대한 양동작전이라고 각각 예상했습니다. 만일 여기서 미국이 대응하지 않으면 히틀러가 결국 오스트리아, 체코를 병합하고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 처럼 미국의 무대응이 소련의 오판을 불러일으킬거라고 판단했습니다.

    "6월 26일에 트루먼은 최측근 참모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지구본을 중동 쪽으로 돌려 이란을 가리켰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들은 여기서 분쟁을 일으키겠죠.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 년 전에 그리스에서 했던 것처럼 지금 강력하게 대처해서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 이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단지 준비나 하면서 방관한다면 이란으로 진격하여 중동 전체를 장악할 거예요. 지금 우리가 전장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그들이 앞으로 무엇을 할지 말해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콜디스트 윈터』 P256~P257,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물론 이다음 어떤 식으로 개입할지가 문제였고, 공군과 해군을 통한 제한적 개입일지(즉 자국민 철수를 위한 행위), 육군까지 동원할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예산을 쭉 삭감해왔기 때문에 제대로 가용가능한 육군 병력도 없었고 심지어 대만군을 동원해야하나 하는 검토도 있었죠.
    저 솔까역사가 주장하는 사전배치전단이라는건 당시 실존하지도 않았고, 당시 한국에 가장 먼저 파견한 미 8군 24사단의 경우 일본에 주둔중이었기에 빨리 파견이 가능했던것 뿐입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가 그간 조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 국방예산 삭감과 일본 현지 상황(전쟁이 더는 없는 상황.)까지 맞물려 미 24사단은 완전 편제 상태도 아니였으며 병사들의 훈련상태나 조직력이 매우 엉망이었습니다. 전차도 준비된게 없어 전시중인걸 급히 수리해서 보내야 했을 지경이고, 그간 국방예산 대량 삭감으로 실전 경험많은 이들이 전역한 상태라 전역한 이들을 부랴부랴 재소집하기도 했을 정도로 사실 미국은 당시 전쟁에 대한 준비상태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에 개입하겠다는 트루먼의 결정속도가 이례적으로 빨랐고 당시 최악의 상태인 육군 투입까지 과감히 결정한 것이 한국으로써는 천운입니다.(물론 위의 솔까역사는 북한이 통일하지 않아서 원통하다고 해댔습니다.ㄲ)

  • 파리13구 2015/07/29 21:28 #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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