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유대인과 미국인 정체성 사이에서... Le m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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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가 미국 국무장관에 임명 (1973년 9월 22일)된지 2주만에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아랍 주변국들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키신저는 자신의 이중 정체성의 모순에 직면했다. 유대인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냉전시대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 정치인으로서의 키신저라는 2중의 정체성이었다. 

그것은 동족인 유대민족의 곤경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정치적 압력 사이에서의 번민이었다.

당시의 번민에 대해서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내 고민은 감정의 스펙트럼의 끝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비록 유대교를 믿지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 가족 중 13명이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는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나는 통제 불능상태에 빠질 수도 있는 잘 의도된 정책을 통해 또 한번의 홀로코스트를 유발할 수 있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친한 친구들이었다. 

닉슨 처럼, 나도 나의 감정적 선호를 국익에 대한 나의 인식에 굴복시켜야만 했다. (역자주-개인 감정보다는 국익이 우선이다.) 나의 종교에 대한 역사적 의심때문에, 나는 특별히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었다. 때로 그것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안보는 결국, 개인 감정이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되어야만 보존될 수 있었다. 


출처-

Kissinger, Years of Upheaval, 203-20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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