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혁명과 암기식 교육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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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디 블로그,대안 미디어의 완벽한 사례?
프랑스의 대안미디어, 봉디 블로그는 블로그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고, 전통 미디어와 어떤 협력이 가능한지 보여준다. 특히 그동안 프랑스 주류언론의 소외대상이었던 교외빈민가의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스스로 알린다는 의미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대안 미디어로서의 블로그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동안 저널리즘의 세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제공한다는 것 아닐까?
제프 자비스 Jeff Jarvis의 지적처럼, “블로그는 지금까지 발명된 가장 싸고, 쉽고, 빠른 출판 도구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에 가지지 못했던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면, 봉디 블로그는 이를 대표하는 사례다.
봉디 블로그는 2005년 11월 11일에 탄생한 프랑스의 온라인 미디어이다. 블로그의 목적은 2005년의 교외빈민가 폭동으로 인해서 전세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바가 있는 교외빈민가 지역의 인종적 다양성과 지역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Le Bondy Blog
주소- http://bondyblog.liberation.fr/
봉디 블로그는 2007년 이래, 무료신문 20미뉘트, 야후 프랑스의 후원을 받았고, 2015년 1월부터는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후원을 받는다.
봉디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은 30여명의 블로거들이고, 그들의 대부분은 교외빈민가 출신의 아프리카 및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고, 2005년 교외빈민가 폭동의 주무대였던 센 생드니 지역 주민들이다.
<역사>
봉디 블로그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스위스 잡지 엡도 l'Hebdo의 언론인 세르주 미셸 Serge Michel 이었다. 당시는 2005년 교외빈민가 폭동이 한창이었다. 이 사건 취재를 위해서 엡도 지의 언론인 15명이 3달 동안 봉디에서 취재했다. 이러한 스위스 언론인의 교외빈민가 취재는 프랑스 언론의 관점에서 외국 언론의 교외빈민가 현실에 대한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취재 과정에서 엡도 지의 폴 액커만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교외빈민가 취재를 위해 이 스위스 잡지가 동원한 혁신은 온라인 저널리즘을 적극적으로 포용한 것이었다. 2005년 11월 폭동이 한창이던 시점에서, 엡도는 파리의 북동쪽의 봉디에 7일-10일 주기로 특파원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지역의 축구팀으로부터 방 하나를 임대한, 엡도의 기자들은 주간지 기사만을 작성하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치지 않았다. 주간지 엡도는 스위스 로잔느에서 발행되었고, 44,000부가 발행되었다. 기자들은 엡도 지의 사이트에 봉디 블로그라는 공간을 마련, 그곳에 하루에도 몇번씩 길고 짧은 글을 올렸다. (www.hebdo.ch/bondyblog.cfm).
몇 달이 지난 후에도, 기자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취재했다.
잡지의 편집장은 알랭 장네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했다 : "폭동이 잠잠해졌고, 텔레비전 카메라들이 지역을 하나 둘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봉디에서의 일상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10여명의 엡도 소속 언론인들이 봉디에서 취재를 했다. 그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남자,여자 기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전쟁 보도 기자, 기업 전문 기자, 사회부 기자, 정치 칼럼리스트, 문화부 기자 등이 있었다. 그들은 봉디 블로그에 그들의 일상, 그들이 만난 사람들에 대해 적었고, 잡지에는 기고할 수 없었던 지역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포스팅했다.
취재 과정에서 그들은 위험을 감수했다. 그들 중 한명은 노상강도를 당했다. 그들은 실업 청년을 인터뷰했고, 사교 모임에도 갔고, 미래의 기업인들도 만났다. 그들은 황폐화된 지역 마을을 서술했고, 경찰에 대한 지역민들의 불만, 집 없는 어머니, 알려지지 않은 죽음, 지역 특유의 사투리들을 알렸고, 동네 조폭들을 만났고, 시장도 만났다. 2005년 11월에 시작된 취재는 성탄절을 넘겨, 다음해 신정을 넘기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류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을 알렸다. 가령 한 기자는 인터넷 카페에서 이용자들이 구글로 주로 어떤 것을 검색하는지도 조사했다.
그들은 처음에 주간지 기사 작성이 주된 활동이었고, 블로깅은 부수적이었지만, 점점 주객이 전도되었다. 몇몇 기자들은 블로그가 자신들의 쓰기 활동을 변화시켰다고 고백했다. 처음에 그들에게 블로깅은 취재 후기 성격의 부수적 활동이었지만, 몇주만에 블로깅은 그들이 봉디에서 취재를 하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 그 결과 잡지를 위한 10여건의 기사 작성 외에, 그들은 블로그에 10만 단어 이상의 포스팅을 올렸다.
기자들은 봉디에서 독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법을 배웠다. 기자들은 독자들의 의견을 듣기위해서 그들을 사무실로 초대했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기자들은 독자들과 토론을 했고, 이같은 독자의 반응이 이후 포스팅을 위한 영감을 주었다.
봉디 블로그가 성공하자, 엡도는 블로그 변신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스위스 주간지는 봉디의 청년들을 선발, 스위스 로잔느에서 저널리즘 교육을 시킨 후에 그들에게 봉디 블로그의 운영을 넘겨준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엡도는 봉디 블로그에 기술,편집을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엡도의 세르주 미셸은 다음을 회고했다 : "우리는 이방인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교외빈민가의 현실을 보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제 우리는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우려한다. 저널리즘의 도구와 블로깅을 통해, 봉디 주민들이 자신의 사회적 공간에서 주요 행위자가 되도록 도왔다."
이러한 봉디 블로그 이야기는 2006년 4월 쇠이유 출판사를 통해 책으로 출간되었다.
2006년 말, 봉디 블로그는 파리 정치대학과 협약을 체결했다. 블로그 운영자들이 프랑스 전국의 교외빈민가 고교들을 방문, 학생들에게 블로그를 위한 글을 써달라고 제안했고, 파리 정치대학은 이 글들을 입학을 위한 경력이 되도록 서로 합의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작성된 글들은 봉디 블로그에 <<프랑스 교외빈민가 순례>>라는 항목에 소개되었다.
2007년, 봉디 블로그의 독자는 한달 평균 20만 명이었다. 같은 해 9월초 누적 방문객이 100만 명이었고, 12월말 방문객은 1,674,241명이었다. 매일 2개의 글이 올라왔고, 어떤 글들은 음향과 비디오를 포함한 텍스트였다.
2010년 1월부터 5월까지 5개월 동안, 봉디 블로그 방문자는 200만명에 달했다.
2007년 9월, 봉디 블로그는 블로그 학교를 만들었다. 학교의 목적은 교외빈민가 청년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리기 위한 것이고, 이는 글 뿐만 아니라 오디오 비디오를 통한 표현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학교는 격주 토요일에 열렸고, 학교 강의를 위해 프랑스 언론의 위인들이 선생으로 참여한다.
2009년 9월, 봉디 블로그는 저널리즘 학교 입학 준비반을 만들었다. 준비반은 장학교육을 통해서 교외빈민가 출신 영재들이 언론인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2010년 9월, 봉디 블로그는 프랑스 국회방송에서 <<우리 동네소식>>이라는 방송을 시작했다.
2011년 1월, 봉디 블로그는 국회방송과의 협력 하에, 봉디 세대란 방송물을 만들었고, 이것이 봉디 블로그 카페가 되어, 2012년 프랑스 대선후보들을 초청해서 대담을 가졌다. <<봉디 블로그 카페>>는 현재 국회방송과 프랑스0 채널에서 방영중이다.
현재 봉디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은 50여명의 교외빈민가 청년들이다. 대부분은 센-생드니에 산다.
덧글
지인들이나 주변인들로부터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말을 들었었죠.
지금이야 안경괴인이지만...(어?) ㅋㅋㅋ
블로그라는 통로를 통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는 기회를 잡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