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유가족의 분노와 법치주의의 문제... Le monde


[고대 그리스]
[익사자][유가족][분노]
[법치주의]
[아르기누사이 해전]

해상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했을때 그 유가족이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문제는 유가족의 분노가 법치주의라는 틀에서 정당하게 해소될 수 있는지 여부이다. 

다음 고대 그리스 시절의 한 해상참사는 유가족의 분노와 법치주의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 Battle of Arginusae 을 어떻게 볼 것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막바지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군간의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아테네가 승리했다. 하지만, 전투과정에서 난파된 함선이 생겼고, 일부 아테네 해군이 구조작업을 했지만, 기상악화로 인해 구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스파르타 해군의 위협 때문에 전병력을 구조에 투입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 많은 아테네 수병이 익사했고, 그 시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위키 백과에 따르면, 해전 직후 아테네 해군 장군들은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50척의 스파르타 해군 함정이 코논을 여전히 봉쇄 중이었고, 이 배들을 공격,파괴하지 않으면, 이 배들이 스파르타 잔여 함대에 합류할 수도 있었다. 

동시에, 전투에 침몰하거나 파손당한 25척의 아테네 해군 함정에서 생존자들이 아르기누사이 섬 바다위에서 표류 중이었다. 

이 두가지 문제에 동시에 직면한 아테네 장군들은, 8명의 장군들 모두 스파르타 잔여 세력을 파괴하기 위해서 출동하기로 결정했고, 3단노 갤리선 함장인 트라시불로스 Thrasybulus 와 테라메네스 Theramenes 가 남아, 생존자 구조에 나섰다. 

하지만, 악천후 때문에, 두 해군 집단 모두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함정들이 항구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스파르타 해군의 잔여 선박이 탈출했고, 수병 구조 작전도 불가능했다.

<<장군들에 대한 재판>>

아테네에서, 승전의 기쁨은 잠시 뿐이었고, 대중의 관심은 선원 구조 실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있었다. 거친 논쟁이 시작되었다. 8명의 장군들이 아테네 민중들이 구조 실패에 분노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은 이미 도시로 귀환한  트라시불로스 Thrasybulus 와 테라메네스 Theramenes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의회에 편지를 써서, 2명의 3단노 갤리선 함장에게 재앙의 책임이 있다고 알렸다. 

하지만 이 두명의 함장은 변론에 성공했고,  대중의 분노는 장군들을 향했다. 

슬픔에 잠긴 희생자 유족들이 구조 작업을 등한시한 장군들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결정했다. 그들은 아테네 병사들을 익사하도록 방치했다는 점과 익사한 시체를 찾지 못해서 매장할 수도 없게 되었다는 이유로 장군들을 고소했다. 한 선동가가 장군들을 모두 모아 한 번의 투표로 유죄를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았다.  

8명의 장군들은 즉각 해임되었고, 재판을 위해 아테네로의 귀국 명령을 받았다. 이 중 2명의 장군은 도피했지만, 나머지 6명의 장군은 귀국했다. 그들은 귀국 즉시 투옥되었다. 

6명을 한번의 투표로 유무죄를 가리는 문제가 의회에서 토론되었다. 마침 그날 소크라테스가 의회 의장단에 참석했다. 사안이 민회로 가기전에 ,소크라테스는 의회에서 6명의 장군의 유무죄가 한번 투표로 결정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묵살당했다. [그리스 사법 제도에서 의회와 민회의 관계는 오늘날 국회 상임위와 국회 본회의 관계와 유사했다. 의회에서 안건이 통과되야, 민회에서의 토론,표결이 가능했다]

결국 민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한 선동가가 "누군가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막으려면 끔찍한 일을 겪게 될 것이다"라고 외쳤다. 다른 선동가는 재판에 항의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이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민회의 모든 시민들이 선동가를 따랐고, 재판의 위법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침묵을 강요받았다. 

투표가 진행되었고, 여섯 명의 무고한 장군들이 정당한 재판 절차없이 모두 처형되었다.  이들 중에는 페리클레스의 서자, 소 페리클리스 Pericles the Younger 도 포함되었다.    

처형 직후, 아테네인들은 장군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처형을 선동한 자를 처벌하려 했다. 하지만 칼리세이누스 Callixeinus 는 재판이전에 탈출에 성공, 몇 년뒤에는 아테네로 귀국했다. 하지만 그는 아테네 민중의 경멸을 받았고, 결국 굶어 죽었다.

폴 우드러프는 아르기누사이 참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사건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가졌던 문제, 즉 대중의 입장에 반하는 입장을 제시하는 자는 침묵을 강요받았던 문제를 드러냈다. 

민주주의의 성패는 반대 의견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아는 능력에 의존한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사람들은 종종 이 사실을 잊는다. 누군가 대중의 기준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면, 사람들은 그를 민중의 적으로 낙인 찍으려 한다. 

그러나 이는 전혀 민주적인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다수가 모여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면서 참주의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법 처형이 끝나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테네인들이 법을 유린하자고 선동한자들을 처벌하려 했다. 하지만 스파르파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이 계획은 철회되었다.



출처-

폴 우드러프, 최초의 민주주의- 오래된 이상과 도전, 206-208

영문 위키백과, 아르기누사이 해전 Battle of Arginusae  



덧글

  • 옵대장 2014/11/18 19:12 # 답글

    저 대중 혹은 다수의 의견이 진정으로 다수의 의견인가?

    이 또한 민주주의에서 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소리 큰 소수가 대중을 선동하여 다수로 둔갑한 사례는 과거 역사에 얼마든지 있었고 지금까지도 존재합니다.

    선동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것이며 들어나지 않은 shyNO세력을 어떻게 수면위로 끌여들일 것인가?

    이를 법적 시스템으로 정비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지금으로선 민중의 교육의 '질'을 높이는 수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
  • 파리13구 2014/11/19 10:54 #

    그렇습니다. ^^
  • 메이즈 2014/11/19 01:33 # 답글

    사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대세를 그르친 사례는 저것만이 아니긴 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가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알카비아데스의 탄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탄핵의 주원인은 바로 반대파가 주도한 선동질에 있었죠. 게다가 아테네 대중은 알카비아데스가 억울하게 쫓겨나긴 했어도 이후 시칠리아 원정의 기밀을 팔아넘겨 나라를 망친 점은 잊고 또 귀국을 시켜 줍니다. 그 결과는 물론 잘 알려진 그대로입니다.
    (참고로 알카비아데스는 본인만 죽고 끝난 게 아니라 나중에 스승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 직접민주주의가 아르기누사이 회전에 필요한 함대와 병력을 마련해 주는 데 기여한 것도 분명한 사실(엘리트들이 주도했으면 조건부 항복을 결정했을 겁니다. 사실 항복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고)이니만큼 복잡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파리13구 2014/11/19 10:55 #

    네, 쉽게 해결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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