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교외빈민가에 가다 (2) La culture francaise

프랑스 교외빈민가는 불타고 있는가?


[1부에서 계속- 링크]

방리유- 차라리 다른 나라

파리를 출발, 지하철로 93지역에 도착하자,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느낌을 받았다. 이같은 인상은 지상전차 1호선을 타자 더욱 강해졌다. 이곳 주민들은 전차1호선의 연장을 원한다. 전차1호선은 굼벵이의 속도로 93지역 절반을 가로지른다. 정차하는 역마다, 창밖의 풍경은 더럽고,불결하고,적대적이고, 특히 게토와 같은 인상을 준다. 열차 내부는 숨을 내뿜는 악취로 가득하고, 승객들의 얼굴에는 슬픔과 피로가 녹아있다. 휴대폰을 보는 사람도 거의 없고, 거의 모든 승객이 책이나 신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지 다른 곳은 보지 않는다. 어떤 승객도 승차권 혹은 정기권 카드를 단말기에 찍지 않는다. 차장도 승객이 요금을 지불하는지 신경쓰지 않으며, 그는 사람이 문에 끼지않게 하기위해서 너무 바쁘다. 하지만 서로서로 처다보지 않는 파리에서와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승객이 열차에 오를때 가볍게 목례를 한다. 

전차는 방리유의 구성을 반영한다 : 하층 프롤레타리아, 많은 아이들, 짙은 매우 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매우 적은 중산층. 사람들은 매우 단순한 옷을 입는다 - 수도 파리의 옷매장에서 볼수 있는 우아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이곳을 파리라 부르지 않고, 파남 “Paname”이라 부른다. 이곳은 혼혈의 프랑스이고, 매우 가난한 프랑스이다. 이곳 사람들은 400유로의 연대수당 덕분에 먹고산다. [연대수당 RSA: Revenu de solidarité active 실질 연대수당- 빈민에 대한 보조금, 2014년 현재 499유로] 그들은 심지어 이곳을 떠날수조차 없다. 지난 2011년에 전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 언터처블이 바로 이같은 현실을 반영했다 : 교외빈민가의 흑인 청년에게, 수도 파리에서 괜찮은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것은 기적이다! 


그렇다고 93지역이 자포자기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다. 26세의 기초단체 의원 시세는 파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모리타니아, 어머니는 세네갈 출신이다. 시세는 2005년 교외빈민가 폭동 당시에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에 사망한 2명 중 한명이 그녀의 친척이었다 : "나는 방리유의 딸이다. 중학생 때부터 나는 시민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폭동이 발발했을때, 나는 차별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몇몇은 폭력으로 저항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려 했다."

2개의 통계만 봐도, 우리는 왜 클리쉬 Clichy 마을이 지난 2005년과 여전히 유사한지 이해할 수 있다 : 주민 3만명 중에, 10명 중 7명이 빈민이고, 청년실업율이 40%에 도달했다. 사정이 그렇기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해야만한다고 결심했다. "2005년 전에는, 93지역의 청년들이 정치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기초와 지방자치단체 의원들 중 일부가 이곳 청년 출신이고, 이들은 역동적으로 활동 중이다."라고 정치학자 질 케펠이 분석했다.

마리앙 시세 Mariam Cissé, 그녀는 무슬림이며, 마을의 용기있는 시장인 클로드 딜랭과 같이 일한다. 딜랭 시장은 61세의 사회당원이며, 소아과 의사 출신이다. 그는 경제학자인 에릭 모랭 Eric Maurin 이 강조했던 것 같은 프랑스 게토 Le Ghetto français 를 오랫동안 비판해 왔다. 모랭에 따르면, 프랑스 사회의 게토화는 프랑스 사회의 최고 권력자들의 정치적 결정이다. 왜냐하면, 게토 덕분에, 상류층이 이민자와 프랑스 빈민과 함께 살지 않아도 되고, 이민자와 빈민의 자녀와 부자의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파비앙 오르티즈는 방리유 청년들 중 한명이다. 그는 29세로, 스페인계이며, 93지역에서 성장했다. 그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 "나는 이미 3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현재 첫 장편을 계획 중이다."

한 카페에서, 오르티즈가 우리에게 생드니 지역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설명했다 : "내 조부모께서는 마드리드 부근의 산에서 살다가, 1950년대에 프랑스로 이민을 왔다. 내 아버지는 파리 벨빌에서 태어났고, 당시 그것은 스페인계 동네였다. 아버지는 공산당 기관지 위마니테의 기자였다. 내가 한 살일때, 우리는 생드니로 이사왔다. 중학생일때, 나는 학교에서 유일한 유럽계 학생이었다. 2명의 알바니아계를 제외하고 말이다. 나머지 모든 내 친구들은 아프리카, 아랍계였다. 어렸을때, 프랑스 중산층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빈민층과 같이 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양자간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중산층이 이곳을 떠났다. 현재, 우리는 게토에 거주 중인 거의 유일한 앵글로색슨계 주민이다 : 이곳 주민들은 모두 빈민이고, 실업상태이고, 대부분이 빈민 보조금 덕분에 먹고산다. 

오르티즈가 생드니 성당 앞에서 2명의 게토 친구와 만났다. 그의 친구인 바발리와 곤잘레즈는 래퍼다. 그들은 33세이고, 노래를 부르면 먹고살고, 지하철 13호선 역에서 CD를 판다. 기자가 그들에게, 프랑스 공화국의 표어가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조롱했다 : "네, 물론입니다. 중학교 정문앞에, 자유,평등,박애라고 써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자들의 전유물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나쁜 농담에 불과합니다."


(3부에서 계속....)  



덧글

  • 레이오트 2014/11/06 09:38 # 답글

    계속 보는데 이번에는 별로 할 말이 없네요.
  • Megane 2014/11/06 10:47 # 답글

    시민혁명으로 공화정을 이루었지만 그 이전과 바뀐 건 하나도 없었어요...
    뭔가 아스트랄하면서도 수긍이 가는...
  • 레이오트 2014/11/06 10:56 #

    이런 상황이다보니 트랜스휴머니즘이 답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 메이즈 2014/11/06 21:33 # 답글

    인터뷰 대상자 가족들의 출신지를 보니 어째서 저 지역이 가난하게 사는지 한눈에 알 것 같은데 말이죠.

    우선 세네갈 출신이라고 하면 지역 종교탄압 난민 혹은 농촌 출신 외국인 노동자일 텐데(유럽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의 상당수가 그대로 정착을 합니다), 이들은 제대로 된 배움의 기회를 가진 적이 없어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고,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어 수입이 극히 적으니 주류 사회의 거주지에서 밀려나고, 밀려난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빈민가가 형성되고, 벼랑끝에서 살다 보니 문제가 끊이질 않고, 문제가 많다 보니 다시 찍히고, 2세들도 답 없는 집안과 사회에서 살다 보니 처음부터 낙인이 찍히고, 악순환의 반복이죠.
  • 레이오트 2014/11/07 12:53 #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인 노동자 상당수 최종학력이 고졸 내지 대졸 수준이라는 것과 대비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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