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는 어떻게 학살 방법을 발전 시켰을까?" Le monde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1939년 9월...


[나치 독일]
[홀로코스트]

"나치 대량학살 수단 진화의 동력은?"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보면, 나치의 유대인 박해정책이 급진화된 것은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의 개막과 더불어서 였다.

처음에는 친위대 산하의 학살 전담부태인 살인특무부대 Einsatzgruppen가 투입되어, 1941년 6월부터 1942년 4월까지 대략 55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학살자들은 거대한 구덩이 앞에서 유대인들의 목에 총격을 가해서 죽음의 잔치를 벌였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정책을 급진화를 맞아, 힘러는 "인간을 몰살하는 동시에 품위를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나치즘의 본질이다."라고 발언하는 등, 친위대의 정신교육을 강화했고, 그의 부하들에게 나치식으로 이상적인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라고 강조했다.

전후인 1962년 4월 24일에 살인특무부대 출신 오토 에른스트 프라스트 Otto Ernst Prast 에 대한 심문에서,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는 당시에 우리가 새로운 고귀한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개인의 물질주의와 이기심에 투쟁하거나 혹은 억압하는 투쟁의 문제였다. 이는 가치의 전도였고, 심지어 휴머니즘 조차도 넘어서는 것 이었지만, 당시 나에게 그 의미는 전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같은 직접 살인 방식은 살인특무부대 병사들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총격을 통한 학살에 가담한 특무부대원들이 심리적인 괴로움들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부전선 시찰 도중, 유대인 처형 현장을 직접 참관한 친위대 총사령관 힘러가 이러한 집단 총살이 살인특무부대원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중 시키는 야만 행위임을 절감, 좀 더 인간적인 살해 방법을 모색하도록 지시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마이클 버레이에 따르면, 그 결과 덜 직접적인 방식의 살인 방법이 고안되었고, 1941년 9월에 도입된 살인용 가스트럭, 41년 12월에 가스차를 이용한 대량학살을 개시한 헤움노 절멸수용소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그 고안 과정에서 다음 같은 원칙이 적용되었다 한다. 살인방법의 혁신은 희생자에 대한 실존적 테러를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인자의 심리적 부담을 최소화 시키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치식 인간성이었다. 


참고-

Burleigh, The Third Reich: A New History, 614-615쪽



덧글

  • kiekie 2014/09/19 13:22 # 답글

    수용소 등 수감시설에서도 관리자들이 수감자들을 '인간'으로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해 관리번호를 몸에 찍는 등 여러 요소를 마련했다고 해요. 정말 소름끼쳐요.
  • 파리13구 2014/09/19 13:33 #

    그렇습니다... 덜덜...ㅠㅠ
  • 파리13구님 2014/09/19 18:45 # 삭제 답글

    IG FARBN같은 기업의 협조 역시 유대인
    학살에 큰 기여를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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