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심 선행교육에 대한 루소적 비판 미분류

마르크스의 한마디...

이번 세월호 참사를 맞이하고 정진곤 교수의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읽다가, 다음 대목을 읽으면서 아픔을 느꼈다. 

“어린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그들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어른들이 장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과 판단에 기초해서 아이들의 즐거움과 행복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어린 시절은 두 번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정진곤, 교육이란 무엇인가?, 66쪽


루소는 다음을 주장했다.

“확실치 않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저 잔인한 교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린이들을 온갖 구실로 속박하고, 결코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고 언제 도달할지도 모를 그런 행복에 대비시키기 위해서 어린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부터 시작하는 잔인한 교육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설령 그 교육의 목적이 일리가 있다고 할지라고 어떻게 그 견딜 수 없는 멍에 밑에서 마치 노예나 죄수처럼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작업을 강요당하며, 그나마 그 많은 수고가 그들에게 장차 유용할 것인지도 확실치 않은 불행한 아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의분을 누를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즐거워야 할 시기를 눈물과 징벌과 협박과 노예상태 속에서 보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핑계 대며 그 아이를 불쌍할 정도로 괴롭힌다. 이와 같은 잔인한 교육을 모면할 수 있는 어린이는 행복한 어린이다.” 
루소,에밀, 정봉구 역, 1984,108쪽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어른인 선박 책임자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없이 희생당한 단원고 학생들의 비극적인 삶을 떠올리게 된다. 대다수 학생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각종 선행교육에 시달려야만 했을 것이다.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들로 대표되는 한국의 학생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선행교육 그리고 입학 후에는 입시교육의 노예가 되어, 청춘 시절에 당연히 누려야할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박탈당하는 현실의 극복을 위한 루소적 대안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루소의 에밀이 교육의 역사에서 가져온 교육계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무엇이었는가? 루소의 학생중심교육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루소의 에밀은 21세기 한국교육에 어떤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학부모도, 교과서도 아닌 학생이 교육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교훈일 것이다. 이렇게 루소의 <에밀>은 오랫동안 서양교육을 지배해온 교과중심에서 아동중심으로 전환시키게 한 결정적인 작품이다. 

루소에 따르면, 교육은 아동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생을 잘 연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라. 왜냐하면, 여러분은 분명히 학생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루소는 아동발달단계를 유아기,아동기,소년기,청소년기,청년기의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아동의 발달단계에 따른 특성을 이해하고,이에 알맞은 방식으로 교육해야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아동 발달단계는 일종의 자연 질서를 따르는 것으로, 교육자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고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없다. 
 
이 같은 루소의 아동발달 단계론에 따르면, 한국의 선행학습 관행은 지나친 것이다. 이는 독일 같은 선진국의 사례와 다르다고 한다. 가령, 독일의 취학통지서 밑에 적혀 있는 경고문구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귀댁의 자녀가 입학 전에 글자를 깨치면 교육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뇌 발달과 맞지 않는 선행교육이 가장 나쁩니다”, 
한겨레신문, 2013년 6월 10일, 주소-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591234.html 

 만일 어떤 학부모가 이 경고를 어기면 학교의 담임선생으로부터 “왜 그렇게 부도덕한 일을 하셨습니까? 그 아이가 수업시간에 산만하고, 집중 안 하고, 인격형성에 장애가 생기면 당신이 책임질 겁니까?”라는 식의 ‘취조’를 당한다고 한다.

앞의 기사에서, 서울대 의대 서유현 교수는 한국의 선행교육은 뇌발달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는 루소적 아동발달단계론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우리 뇌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층의 성장 시기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발달하는데 시기별로 발달영역의 기능이 전부 다르므로 각각의 시기에 걸맞은 교육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선행교육이 뇌발달에 모순되는 현실에 대해서 서유현은 다음을 지적했다 : “우리의 뇌는 크게 3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생명유지의 뇌, 2층은 감정과 본능의 뇌, 그리고 마지막 3층은 공부와 이성의 뇌입니다. 뇌는 20년 동안 서서히 발달하는데, 시기별로 뇌의 발달부분과 각 부분이 기능하는 영역이 다 달라요. 그래서 아직 인지기능이 발달 안 된 유아에게 모국어가 아닌 인위적인 언어교육을 하면 원래 이 시기에 발달해야 할 감정과 본능의 뇌가 잘 발달하지 못합니다. 언어를 관장하는 측두엽은 7~8살은 되어야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때문에 언어교육은 초등학교에 가서 시키는 게 맞는 겁니다.” 

서유현이 인간의 뇌 3층 공부와 이성의 뇌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위는 전두엽이다. 전두엽은 감정조절 외에도 인간사고의 가장 고차원적 기능들, 즉 창의적 계획 수립, 선택적 주의 집중, 호기심, 동기부여 같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전두엽이 극도로 발달하는 시기가 바로 유아기라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엔 그 무엇보다 우선해서 도덕성과 인성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유치원에서는 도덕성,인성교육 보다는 문자 교육 같은 인지교육만 하고 있기 때문에 전두엽 발달에 장애가 온다는 것이 서교수의 지적이다. 유년시절의 지나친 인지교육에 따른 전두엽 발달 지체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같은 감정조절 장애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지교육 중심의 선행교육은 뇌발달과 맞지 않고, 이 같은 선행교육은 아동의 뇌를 망친다는 것이 서유현 교수가 강조하는 바이다. 도덕과 인성교육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언어 공부를 시키니 뇌가 망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선행교육은 남보다 일찍 망하는 교육이 된다는 것이다.

루소가 교육은 아동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서유현 교수도 아이 교육의 출발은 부모가 아이의 뇌를 잘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부모들이 아이의 뇌를 잘 관찰해야 해요. 아이들을 부모 욕심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진짜 뭘 좋아하는지 알고 그것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돼야 하는 겁니다.”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마음을 버리고 아이를 사랑만으로 잘 바라보라”라는 것이다. 

한편, 한국의 문자 교육 중심의 선행교육은 뇌발달 단계론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아동이 가진 구술성 orality 에 대한 오해,즉 아동에게 가능한 빠르게 문자를 교육시켜서 문자성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좋다는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하지만 구술성을 연구한 학자들, 해롤드 이니스, 맥루한, 잭 구디, 레비스트로스, 에릭 해블록, 월터 옹 같은 학자들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인류의 구술성 연구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월터 옹의 연구이다. 
월터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언어를 다루는 기술, 문예출판사,2009 

 현대의 교육제도에서 인류의 구술성이 무시되고, 교육제도가 읽기와 쓰기 같은 시각적 문자해독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본다.  아이들이 가진 구술성을 타도 혹은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아동이 문자습득 이전의 구술성 상태에서 문자해독 상태, 문자성의 상태로의 이행을 아동의 발달,진보로만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문자습득 이전의 아동은 비유하자면 문자가 없던 고대 그리스시대, 즉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 시절의 구술 문화 하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릭 해블록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서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전환이라는 미디어 혁명이 있었다고 한다. 
에릭 A. 해블록, 플라톤 서설- 구송에서 기록으로 고대 그리스의 미디어 혁명, 글항아리,2011
 
 기원전 720년-700년 사이에 만들어진 알파벳이 그리스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말하기와 듣기 중심의 구술문화에서 읽고 쓰기 중심의 문자문화로의 전환이 있었다는 것이고, 플라톤이 바로 이 같은 전환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구술성에서 문자성으로의 인류 역사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아동 문자 교육을 보면, 아이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것이 단지 문자 습득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혁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아동에게 문자를 조기에 교육시키는 것은 신중하게 결정해야할 문제라 생각한다.  

아동의 문자 조기교육에 대해 우리가 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것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문자 비판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플라톤, 파이드로스, 이제이북스,2012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고 한다. 
월터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언어를 다루는 기술, 문예출판사,2009 
 

첫째, 소크라테스에게 쓰기란 현실적으로 정신 속에 있는 것을 정신 밖에 두려는 것이기 때문에 비인간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물건이며, 만들어진 제품이다.
둘째, 소크라테스는 쓰기가 기억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쓰기를 사용하는 인간은 내적인 자원의 결핍에 따라 외적 자원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쓰기는 기억력을 나쁘게 만든다. 가령, 오늘날에도 부모들은 곱셈 구구단의 기억이라는 내적 자원 대신에 전자계산기가 외적인 자원을 제공하게 될까 두려워한다. 전자계산기가 계산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셋째, 쓰인 텍스트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다.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이 말한 바를 설명해달라고 하면, 그 부탁에 따라 당신은 설명하게 된다. 하지만, 쓰인 텍스트에 아무리 그런 부탁을 해도, 당신은 같은 대답만을 듣게 될 뿐이고, 때로 바보 같은 답만을 듣게 된다.
넷째, 구술문화의 논쟁적 속성을 간직했던 소크라테스는 구술되는 말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지만, 쓰인 말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쓰기의 약점으로 간주했다. 즉 실제의 말과 사고는 본질적으로 언제나 실제 인간이 주고받는 맥락 안에 존재하는데, 쓰기는 이 같은 맥락에서 벗어나 비현실적이고 비자연적인 세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검토하면서, 한국의 무조건적인 문자 선행교육은 아동 발달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아동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이렇게, 한국의 문자중심 선행교육 문화는 루소,뇌발달 단계론 그리고 구술문화 연구성과라는 관점에서 비판 가능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자중심 선행교육을 위한 루소적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루소의 교육론을 21세기 한국사회의 교육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루소는 교육에는 자연이 정해준 순서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무시하고 아이를 하루라도 더 빠르게 성인으로 만들려는 부모의 무지를 비판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한국의 문자중심 선행교육도 이 같은 자연주의적 교육론적 관점으로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루소의 소극적인 교육이 중요하다. 부모가 아이의 자연성이 발현되기 전에 조바심에서 무엇인가를 강제적으로 가르치고자 할때,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이도 불행해질 것이다. 고미숙(2006). 교육철학, 서울: 문음사


결론적으로 한국의 문자중심 선행교육은 아동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서 시작된 교육이 아니라, 다른 부모의 경쟁이라는 압박에 시달리는 부모의 조바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아동의 뇌발달 단계론에 모순되는 것으로, 뇌발달의 불균형을 초래해서, 감정조절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고, 뇌를 발달시키기 보다는 망칠 수도 있다고 한다. 또한 너무 이른 문자 교육은 아동의 구술성을 파괴하며, 문자성만을 발전시키게 되면,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지적한 문자성의 한계의 문제에 직면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 같은 문제의 시정을 위해서는 루소의 소극적인 교육이 요청되며, 아동이 스스로 요구하기 전에, 부모가 강제적으로 문자를 가르치는 것은 자제되어야 하고, 이는 아동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덧글

  • 까마귀옹 2014/06/23 12:41 # 답글

    시사인 이었던가? 경향신문이었던가? 거기에 있던 한 칼럼에서는 한국의 선행학습에 대해 "부모들이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격"이라고 표현하더군요.
  • 파리13구 2014/06/23 14:40 #

    감사합니다.
  • ㅁㄴㅇㄹ 2014/06/23 21:08 # 삭제 답글

    서유현 교수의 주장은 근거가 되지만 대체 18세기 루소나 기원전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근거로 삼다니 우습네 ㅋㅋ 이 분은 교육도 철학으로 반쯤 때우시는 듯 ㅋㅋㅋ
  • 자그니 2014/06/24 12:21 # 답글

    간만에 진지하게 읽었다. 조금씩 고민되는 시점이야.
  • 파리13구 2014/06/24 12:25 #

    엉,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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