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이 국지전이 되지못한 이유는? Le monde

제1차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는 유럽...

[제1차세계대전]
[국지전]
[비스마르크 체제]

국지 전쟁의 가능성

1914년 이전의 유럽에서 소규모 전쟁은 있었다. 1877-1878년 러시아-터키전쟁,1912년과 1913년의 발칸 전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 국지 전쟁은 수없이 일어났지만 대국간의 전쟁은 1914년까지 없었다. 

발칸반도에서의 국지전이 국제적 전면전으로 비화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비스마르크적 국제 질서 속에서 발칸은 부차적인 의미 밖에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발칸에서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간의 분쟁을 어떻게 관리하려 했을까? 
독일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는 통일을 통해 달성한 독일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유럽에서의 평화와 현상유지를 도모했고, 이를 통해 탄생한 것이 바로 비스마르크적 유럽 평화체제였다는 점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비스마르크의 관점에서, 유럽의 평화에 위협이 되는 것은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와 독일간의 대립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간의 대립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후자의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려 했을까?

키신저의 외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외교, 138-139쪽)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독일 연방에 대한 패권 경쟁에서 프로이센에게 밀려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발칸을 빼고는 더이상 확장할 공간이 없었다. 오스트리아가 해외 식민지 확장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도자들은 슬라브족이 있는 발칸 반도를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한 천연적 지역으로 간주했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유럽의 다른 제국주의 열강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발칸으로의 확장이 필요했다. 이같은 오스트리아의 이해 때문에 러시아와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만약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이 상식적이었다면, 발칸으로의 확장 정책이 발칸 민족주의를 자극할 수도 있고, 러시아를 영원한 적으로 만들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만 했다. 하지만 빈과 부다페스트에서 상식이 지배적이지 않았다. 편협한 민족주의가 지배적이었다. 빈의 내각은 국내에서는 타성에 젖었고, 대외정책에서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킨 나머지, 그 결과 메테르니히 이래 오스트리아는 점점 고립을 향해 나갔다.

독일은 발칸에서 아무런 국익도 없었다. 하지만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보존에 관심이 있었다. 만약 이중 왕국이 붕괴한다면, 비스마르크의 전체 독일 정책이 무위로 돌아갈 위험이 있었다. 그 결과, 이중 왕국의 독일계 가톨릭 인구가 통일 독일에 편입된다면, 비스마르크가 공들여 만들려 노력했던 프로이센에서의 프로테스탄트의 우위를 위협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체는 독일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동맹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한편,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보존을 원했지만, 러시아에 도전할 생각은 없었다. 이는 이후 비스마르크를 괴롭힐 난제가 되었고, 그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이 서서히 해체 중이었고, 전리품의 배분 문제로 유럽의 강대국이 자주 충돌했다. 일찌기 비스마르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모든 정치가 다음의 원칙으로 귀결된다 : 세계가 5대 열강간의 불안정한 균형에 의존하는 한, 3개국이 가담한 진영의 일원이 되도록 노력해라!" "All politics reduces itself to this formula: try to be one of three, as long as the world is governed by the unstable equilibrium of five great powers." 5대 강대국들, 영국,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독일 중에서, 프랑스가 적대적이었고, 영국이 영광스러운 고립 정책 때문에 대륙문제에서 거리를 두고 있었고, 그리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의 갈등 때문에 애증의 상태였다. 따라서 5국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3국의 진영에 가담하기 위해서 독일이 러시아,오스트리아와 동시에 동맹을 맺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키신저 외교]>>


비스마르크가 유럽 5국체제에서 독일이 3국동맹의 진영에 가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던 1881년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간의 3제동맹은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을까? 

우선 비스마르크는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Austro-German Alliance을 체결했다. 독오동맹이란, 독일과 오스트리아간에 체결된 방어동맹이었다. 베를린회의 후 러시아에는 반독일적 풍조가 증대했으므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에 대비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가 러시아 혹은 프랑스와 협정을 맺을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1879년 10월 7일 빈에서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주요내용은 ① 체결국의 한쪽이 러시아의 공격을 받을 경우 양국은 전병력으로 상호지원할 것 ② 러시아 이외의 제3국(프랑스)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경우 다른 한쪽은 호의적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물론 독오동맹으로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가까워지면서 러시아를 화나게 만들어, 독러관계를 악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의도는 러시아 고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를 독오진영에 가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의 기원>에서 요하임 르마크는 비스마르크의 의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으로, 독일의 운명을 곤경에 있던 오스트리아의 운명에 연결시키게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맹으로 독일이 오스트리아에게 묶인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가 독일에게 묶였기 때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모든 동맹체에는 말의 역할을 하는 국가와 기사의 역할을 하는 국가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이 동맹에서, 기사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독일이었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빈 주재 독일 대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 "발칸 지역에서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군사력을 이용하려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같은 오스트리아의 구상을 절대로 고무시켜서는 안된다."

이 동맹이 "방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만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 공격의 희생양이 된다면,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자동적으로 지원할 것이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에 따르면, "독일은 러시아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공격할 의사도 없다." 그리고 "만약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공격한다면, 독-오 동맹은 전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독일이 발칸문제로 절대로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오 동맹 때문에, 러시아가 프랑스 등의 서방 국가와 동맹을 체결할 가능성이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비스마르크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는 서방세계의 국가들과 결코 제휴할 수 없고 또한 제휴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짜르의 국가와 영국,프랑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의 견고한 결속 때문에 외교적 고립에 직면할 경우, 러시아는 독일,오스트리아에 대한 분노를 버리고, 현실과 타협할 것"이라고 계산했다는 것이다." [요하임 르마크,제1차세계대전의 기원, 29-32쪽]

이상과 같은 발칸문제에 대한 비스마르크 전략은 국제정치학에서 강대국의 생존전략으로 주장하는 책임전가하기 Buck-passing 에 대한 우려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존 미어샤이머에 따르면, 책임전가란 위협을 당하고 있는 강대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이외의 가장 중요한 대안이다. 책임을 전가하는 나라는 다른 나라가 침략국을 엊지하거나 전쟁을 대신 맡아주기를 바라는 반면, 자신은 개입하지 않거나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책임을 전가하려는 나라는 침략국을 위협을 충분히 인식하지만 위협을 느끼는 다른 나라가 침략국가를 저지하는 성가신 책임을 맡아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미어샤이머,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 314쪽]

발칸문제에서 비스크마르크는 발칸은 독일의 국익과 무관하고, 오스트리아의 문제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 특히 발칸문제로 독일이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독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책임전가하기의 위험을 줄이려 노력했다. 1887년 비스마르크가 "현존하는 조약의 효력 발생 사유의 한계를 모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발칸에서의 헝가리인들의 이익과 가톨릭교도들의 야심을 위해서 오스트리아가 현 상황을 이용해서, 독일의 군사력을 활용하려는 유혹을 우리가 고무시켜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발칸 문제는 어느 경우에도 개전 이유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비스마르크에게 발칸은 "온전한 포메라니아 척탄병 일개 연대 보다도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할수도 없었던" "Balkans were not even worth the healthy bones of a single Pomeranian musketeer" 것이었다.[비스마르크,1878년 2월, 제국의회에서의 연설 중에서]  

결국 비스마르크 체제하에서 국지적으로 관리되던 발칸문제가 비스마르크 체제의 붕괴 이후 분쟁관리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국지전이 국제적 전면전으로 비화했던 것으로 볼수 있다. 비유하자면, 비스마르크 체제하에서 독일-오스트리아 관계가 기사와 말의 관계였다면, 1914년 7월 위기에서는 그 관계가 역전되어, 말이 기사를 태우고 제멋대로 질주하는 형국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스마르크의 독일은 발칸문제로 절대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빌헬름 2세의 독일은 발칸문제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전쟁에 끌려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발칸반도의 국지적 분쟁이 1914년 7월에 국제적 분쟁으로 비화하게 된 원인은 비스마르크 체제의 붕괴 때문이라 주장할 수 있다. 

참고-

이리에 아키라, 20세기의 전쟁과 평화,제2장 세계대전에 이르는 길,을유문화사,1999,37-41



덧글

  • 대공 2014/04/10 16:19 # 답글

    펠로폰소네스 전쟁도 그렇고 무게추가 될 종주국이 동맹국에 끌려들어 가는 순간 위기가 커지는군요
  • 파리13구 2014/04/10 21:25 #

    그렇습니다...
  • 라라 2014/04/10 23:04 # 답글

    오스트리아가 해외 식민지에 관심을 안 둔 건 해군이 없어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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