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확장이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는 사례는?" Le monde

제1차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는 유럽...

                                              <아렌탈-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일반적으로 강대국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다른 나라의 영토를 강제로 병합하는 경우, 병합국가가 스스로 강대국임이 재확인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특히 20세기초 제국주의 역사에서, 제국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은 국력신장, 확장의 결과기 보다는 절망의 몸부림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1908년 10월 6일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이 바로 그 예이다. 합병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명예를 되찾고자 결심했던 아렌탈 Count Alois Lexa von Ährenthal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이 주도했다. 

합병을 추진하면서 아렌탈은 러시아 외무장관 이즈볼스키와 회담,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을 인정하는 대신,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군함의 러시아 군함의 다르다넬스 해협 통행권을 회복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비밀 합의를 했다. (부흘라우 회담 1908년 9월) 

비밀합의 내용처럼, 이후에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얻었지만, 러시아는 해협 통행권을 얻지 못했다. 이즈볼스키는 아렌탈에게 기만당하고 모욕당했다고 느꼈고, 이 분노가 적대감으로 이어졌다 : "더러운 유대인놈이 나를 속였다. 그가 내게 거짓말을 했고, 나를 속였다. 끔찍한 유대인 자식이다!" 

이즈볼스키는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된 이후, 1910년 프랑스 주재 러시아 대사가 되었다. 이스볼스키는 러시아와 프랑스 및 영국과의 관계 강화에 전력을 다했고, 러시아의 재무장을 지지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가 "이것은 나의 전쟁이다!" "C'est ma guerre!" ("This is my war!")를 반복해서 말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이즈볼스키의 분노가 표출된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합병을 단행한 아렌탈은 이를 통해 제국의 영광을 높이려 했고, 2개의 주를 합병하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야심, 즉 세르비아가 남슬라브의 피에몬테가 되고자 하는 야망에 타격을 주고자했다. 아렌탈은 또한 대담한 행동을 통해서, 오스트리아가 동맹국 독일에게 전적으로 종속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실제로 독일 카이저는 합병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하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강제 합병에 따른 이후 외교위기에서 독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의존이 드러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합병에 대한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반발을 힘으로 잠재운 것은 바로 독일이었다. 독일 정부는 1909년 3월 21일 다음 훈령을 러시아 주재 독일 공관에 보냈다.

<<이즈볼스키 (외무장관)에게 우리는 가부의 대답을 원하고 있다고 말할 것. 우리는 회피적인 답변이나 조건이 붙은 답변, 또한 모호한 답변은 거절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할 것. 그리고 우리는 물러서서 사태가 그대로 전개되도록 한다. 더 이상의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이즈볼스키에게 있다.>>  러시아는 최후통첩과 같은 이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면서, 독일-오스트리아 관계가 악화되었다.

러시아가 독일의 압력에 굴복하자, 세르비아는 굴복 이상의 굴욕을 감당해야 했다. 1909년 3월 31일, 세르비아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했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야기된 기정 사실 fait accompli 에 의해서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았다고 인정한다...세르비아는 열강의 권고에 의해서, 지난 가을 이래 병합에 대해 취해 온 항의와 반박의 입장을 버릴 것을 이미 약속했고, 오스트리아에 대해 현재의 정책 노선을 변경, 앞으로 선린에 입각해서 행동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병합은 오스트리아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고, 덕분에 아렌탈은 백작이 되었지만, 역사가 페이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은 당시에는 빛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성공보다는 불운을 더 많이 가져온,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 얻은 승리에 다름아니다. 특히 장기적 관점에서 보자면 더욱 그랬다. 이것은 세르비아와 러시아의 깊은 분노를 유발했고, 나머지 유럽이 오스트리아 외교를 불신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제임스 졸에 따르면, 1908년의 보스니아 위기 부터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까지 4가지 문제가 유럽에서 동맹체제의 대립적 양극화를 심화시켰다고 한다. 

1. 터키가 혼란에 빠지면서, 러시아는 극동의 러일전쟁에서 굴욕적으로 빰맞은 것을 발칸 반도에서 되갚을 절호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고, 오스트리아도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책을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해체를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2. 영국 정부 내부의 많은 관료들이 점점 더,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대영제국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3. 독일은 국내정치적 이유 때문에 해외에서의 공격적인 행동에 나서야 했고, 세계적인 세력균형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도록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유럽에서 독일에게 남은 유일한 동맹이 오스트리아가 되면서, 오스트리아를 필사적으로 지원해야만 했다.독일이 발칸에서의 오스트리아의 모험에 끌려다니게 되었다.

4.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이용, 알자스-로렌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독일의 간섭없이 모로코를 지배하는 것을 추진했다.  


참고-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206-210쪽

제임스 졸 과 고든 마르텔, 제1차세계대전의 기원, 제3판, 68-70 James Joll and Gordon Martel, The origins of the First World War (3nd ed.).2007, 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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