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성립과 몰락 Le monde

제1차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는 유럽...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프랑스가 포위되다!>


[제1차세계대전]
[동맹체제]
[비스마르크 국제체제][비스마르크 동맹체제]
[프랑스 고립]
[세력균형][현실정책][권력 정치]


비스마르크적 유럽 질서의 붕괴에서의 조지 캐넌의 지적처럼,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 배경에서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붕괴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국제질서란 무엇이었는가?

1871년-1894년의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Bismarck’s system of alliances 는 독일 통일의 성과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불전쟁 이후 유럽은 비스마르크의 독일에게는 대체로 바람직한 상태였고,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평화가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보불전쟁의 패전 이후 영토를 상실한 프랑스에 대해서도 보복전쟁 대신에 새로운 유럽의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가지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독일 통일을 위해, 일련을 전쟁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던 비스마르크는 일단 통일 달성되자, 유럽 최고의 평화 옹호자가 되었다. 이는 독일 통일의 성과가 다른 전쟁으로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 이를 위해서, 비스마르크는 "정직한 중개자 honest broker"가 되고자 했다. 비스마르크는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는 동시에, 러시아와도 협조하고, 영국과도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여 노력했다. 이는 프랑스가 5대국 중 다른 한두 나라와 연합하여 현상타파를 시도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었다. 즉 5개국 중 독일을 포함한 적어도 세나라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 현상유지 지향의 체제를 구축, 평화를 유지시킨다는 복안이었다. 이렇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유럽의 강대국들과 복잡한 동맹관계를 구축했다.이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였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최대 목표는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을 유지시키는 것이었고, 노불동맹 FRANCO-RUSSIAN ALLIANCE 과 유사한, 악몽과 같은 反독일 포위 동맹 "Nightmare Coalition" 의 결성을 막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1879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동맹 결성 the Dual Alliance between Germany and Austria-Hungary으로 시작했다. 그는 이 동맹에 이탈리아를 추가시켜서, 1882년의 3국동맹 the Triple Alliance 을 결성했다. 영국과는 1887년의 지중해협정을 통해 아드리아 해, 에게 해, 흑해를 포함한 지중해에서의 현상유지에 합의했다. 이 지중해 협정은 프랑스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동맹 결성 가능성이 높았던 러시아와 1887년 재보장 조약 reinsurance treaty 을 체결했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하에서 프랑스가 동맹국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유럽에서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보불전쟁과 독일통일 이후,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정책의 핵심은 프랑스가 해외식민지 쟁탈전에 몰두하게 유도함으로써, 독일에게 빼앗긴 알자스-로렌을 잊고 지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1898년 파쇼다사건에서, 영불의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수단에서 충돌한 것을 보면,비스마르크의 프랑스 정책은 프랑스가 대독 복수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영불간의 불화를 촉진하는 양날의 칼을 가진 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1873년 프랑스 제3공화정의 유력 정치인, 레옹 강베타가 식민주의를 옹호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식민주의는 프로이센에 대한 복수를 위해 필요한 수단이며, 식민주의를 통해서, 프랑스는 조국이라는 근본적인 가치들을 중심으로한 물질적 그리고 특히 중요한 도덕적 힘을 다시 결집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같은 강베타의 주장은 프랑스의 해외진출을 도와서, 해외에서 영국 제국주의와 충돌하게 만든다는 비스마르크의 구상에 놀아나는 상황에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강베타는 식민지 보유를 통해서 알자스-로렌 회복을 위한 국력을 배양하자는 구상이었지만, 비스마르크의 구상에 따르면, 프랑스가 해외식민지 진출에 몰두할 수록, 알자스-로렌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었다. 

물론, 비스마르크가 총리직에 있을 때, 그는 빛나는 동맹관계 외교술을 통해서, 유럽에서의 평화와 현상유지 보존을 위해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에서 이른바 세계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의 국제질서는 변했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두 나라에 대해서 러시아,프랑스,영국의 3국협상간의 관계가 성립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가장 위헙하다고 간주하는 상황이었다. 그 위험이란, 3국 중 적어도 한나라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에 붙어있기 만들어 놓으려 했던 비스마르크의 동맹구상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하에서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지만, 1차세계대전의 전야에서 외교적 고립을 절감한 것은 바로 빌헬름2세의 독일 진영이었다.   


-참고

이리에 아키라, 20세기의 전쟁과 평화,제2장 세계대전에 이르는 길,을유문화사,1999, 2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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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문고자리 : 과연 파쇼다 사건은 일촉즉발의 위기였지. 2014-04-09 01:38:51 #

    ... 으로 국력 배양을 위한 식민주의였다. 프랑스는 선택을 해야했다. 영국과의 우호를 통한 외교적 고립 탈출이냐, 아니면 식민주의냐. 델카세는 바로 이 문제를 꾀뚫어보고 있었다. # 참고하면 좋은 글 결국 이 사건은 프랑스는 영국의 우세를 인정하며 쉽게 종결되었으며 (애초에 영국군이 들이닥칠 때부터 파쇼다 요새에는 영국, 프랑스, 이집트의 국기 ... more

덧글

  • 명림어수 2014/04/07 22:24 # 삭제 답글

    마지막줄이 제일 의미심장 하네요.
    저 지도를 암만 봐도 독-오 가 포위된 걸로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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