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발칸반도, 1878년-1914년 Le monde

제1차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는 유럽...


[제1차세계대전]
[발칸반도]
[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오스만제국]
[제국의 몰락]

발칸 분쟁, 1878년-1914년

1878년 이전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반도 전체가 오스만제국 영토였다.



1787년, 베를린 회의로 발칸반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베를린 회의 Congress of Berlin 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냔-1878년) 이후 체결된 산스테파노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1878년 6월 13일부터 7월 13일까지 베를린에서 개최된 회의로, 유럽 열강은 이를 통해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확장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둔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 체결한 1878년 3월 3일의 산스테파노 조약은 발칸 반도 전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향권 아래 놓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대해서 발칸반도에서의 러시아의 패권에 대해서 열강이 반발하고 나섰고, 그 결과로 소집된 것은 바로 베를린 회의였다.

베를린 회의의 결과 체결된 베를린 조약 (1878년)은 산스테파노 조약의 29개 조항 중 18개 조항을 삭제하거나 수정하였다. 이 조약은 발칸 반도의 정치적 지형 변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 불가리아 공국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게 자치권을 인정받게 되었으나 영토가 대거 축소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동부 루멜리아와 마케도니아를 회복한다.

2. 러시아의 주장대로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여전히 독립국으로 인정되었으나,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에게 할양받은 영토의 일부는 되돌려줘야 했다.

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중재의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관할권을 받았다. 이것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가 됨을 의미했다. 오스트리아는 이 지역을 1908년에 완전 병합한다.

4. 영국은 중재의 대가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키프로스의 관할권을 받는다. 영국은 이 지역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완전 병합하였다.


1913년 발칸반도

제1차세계대전 직전의 발칸반도 상황을 보면, 오스만제국의 쇠락이 계속되면서 오스만은 보스포러스 해협 일대로 물러나게 되었고,

발칸반도는 작은 나라들로 분할되었다. 이 작은 나라들을 대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영향력 확대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발칸반도를 둘러싼 오스트리아 대 러시아 경쟁의 배후에는 각각 독일과 프랑스가 있었다.  

베를린 조약으로 탄생한 발칸의 군소 국가들 중 세르비아는 남슬라브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발칸반도의 맹주가 되고자 했고,이 세르비아의 열망을 러시아가 지원했다. 이같은 세르비아의 열망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안보에 위협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당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응징을 결심했고, 세르비아라는 위협의 싹을 잘라내려 시도했다. 하지만 세르비아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의 뒤에는 프랑스가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응징이 제한전이 아닌 국제적인 전쟁이 될 위험이 있었다.

7월 5일,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특사를 파견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독일 빌헬름2세가 오스트리아에게 백지수표 blank check 제공했다. 그 백지수표의 내용이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의 전면적인 지원을 기대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사태가 악화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간의 전쟁으로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지원을 기대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독일측 문서에 따르면, 독일 카이저와 베트만 홀베크 총리는 오스트리아-세르비아간의 국지전을 기대했고, 독일의 유일한 동맹국 오스트리아가 쇠락에서 회복되기를 원했다. 1914년 7월의 독일 문서에 따르면, 독일 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한다면, 러시아가 개입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의 민간, 군사 지도자들은 이것이 독일이 받아들일 만한 위험으로 간주했다. 독일은 러시아가 엄포를 놓을 수도 있지만, 그 엄포가 저지될 것이라 전망했다. 1905년 혁명 이후의 러시아의 내정 불안에 주목한, 카이저는 러시아 정부가 전쟁을 결심하지 못할 것이라 보았다. 

한편, 독일 지도자들은 프랑스의 대응도 고려해야만 했다. 1891년에 결성된 노불동맹 franco-russian alliance 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독일은 프랑스의 개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노불동맹에도 불구하고, 1905년의 러일전쟁에 자동개입하지 않았고,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 위기에도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각종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지원을 통해서 독일은 전략적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카이저는 "독일이 포위되었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1914년 7월 위기를 통해,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삼국협상측의 포위망을 분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고, 특히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를 희생시켜서 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참모총장 소 몰트케 Helmuth Johann Ludwig von Moltke 는 카이저에게,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독일이 1914년에 프랑스와 독일과 싸우는 것이 이후에 싸우는 것보다 유리할 것이라 조언했다. 1917년이 되면, 러시아가 1908년에 시작한 재무장 계획이 완료될 것이고, 프랑스는 1913년의 3년복무 징병제 three-year military service law 에 적응하게 될 것이란 주장이었다. 몰트게의 주장은 시간이 있을때, 독일이 프랑스와 러시아에 대한 예방전쟁 a preventive war 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몰트케에 따르면, 전쟁을 통해서 독일은 잃을 것보다 얻을 것이 더 많다는 주장이었다. 

1914년 7월 위기 당시, 독일 지도자들은 독일이 세계적 강대국으로 부상하느냐 아니면 쇠락하는 국가가 되느냐의 전략적 갈림길에 있다고 생각했다. 


정리하자면, 1878년 이후 유럽의 병자, 오스만 제국의 쇠락이 계속되면서, 발칸 반도에서 세력균형이 붕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쇠락을 기회로, 발칸반도에 여러 군소국가들이 등장했다. 

독일에 대한 패권경쟁에서 밀린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로 극동으로의 진출이 좌절당한 러시아 제국에게 발칸반도는 제국의 자존심을 건, 마지막 영토확장을 위한 도박장이었다.  

러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세르비아가 남슬라브 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 오스트리아와 갈등했다. 

당시 독일은 외교적 고립을 절감하고 있었고, 유럽에서의 자신의 유일한 동맹국인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에서 세력을 유지하는 것을 원했다. 

제1차세계대전 전야의 발칸반도는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고 무주공산이 된 발칸반도를 둘러싼 

오스트리아-러시아 간의 대립을 역외의 프랑스와 독일이 각각 지원하는 동맹구도 속에서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 있었다. 


참고-

한글 위키페디아, 베를린 조약

Paxton, Robert O. Europe in the twentieth century, 54-56쪽        




덧글

  • K I T V S 2014/03/18 13:45 # 답글

    참... 똥은 오스만과 오스트리아가 거하게 쌌는데... 지금은 그저 여전히 죽어라! 나가라! 때려라! 난리가 나는게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쪽...ㅠㅠ
  • ㅁㄴㅇㄹ 2014/03/18 18:43 # 삭제

    발칸의 인종갈등으로 인한 문제는 오스트리아보다는 세르비아의 잘못이 크죠. 굳이 더한다면 크로아티아 정도.
  • K I T V S 2014/03/18 19:14 #

    하긴 프린치프 그놈 한놈때문에 지금의 결과가 이러했으니;;
  • ㅁㄴㅇㄹ 2014/03/18 19:39 # 삭제

    [답글]
    아뇨 그 얘기가 아니라...;;
    1차대전이 끝나고 세르비아가 다른 남 슬라브 민족들의 영역을 흡수하여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후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성립한 이후의 얘기입니다. 당시 세르비아 왕국에선 발칸 지역에 유행하던 유고슬라비즘에 편승하여 일단 통일왕국을 수립해 놓고는 나중에 가서 세르비아 패권주의에 입각해 타 민족을 탄압했죠. 그래서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등 다른 구성민족들과 사이가 틀어졌구요. 2차 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의 미친 짓은 이런 감정적 대립에서 이해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나마 공산화 후엔 티토의 오랜 집권으로 어떻게든 국가가 안정이 되었지만, 티토 사후 또 세르비아주의자들이 고개를 쳐들고 다른 나라들도 여기에 저항했던 까닭에 결국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기에 이릅니다.
    발칸의 인종 문제는 여기서 기인하는 부분이지, 오스트리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은 아닙니다.
  • K I T V S 2014/03/18 19:43 #

    대세르비아 주의 및 이것에 반항한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의 무서운 만행도 알고 있습니다... 뭐, 전 오스트리아가 그래도 굳건히 있었으면 조금더 안정적인 동유럽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있어서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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