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술집,여인숙-17세기초 영국의 공론장?" Le m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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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
[하버마스]
[선술집][여인숙]


19세기 매스미디어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의 뉴스는 어떻게 전달되었고, 수용되었을까?

우선 하버마스의 개념인 공론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하버마스에 따르면, 사적 개인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사회적 문제들을 거론하고, 토론을 통해서 정치적 행동에 영향을 주는  논증적인 공간이자, 여기서 개인들과 집단들이 모여서 상호 관심사를 논의하고, 가능하다면 공동의 판단에 도달하는 '공론장'의 형성은 서구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결정적이었다. 사적 개인이 공중으로 결집할 수 있는 가능성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성패를 가름하는 잣대와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무력과 폭력이 아닌 대화와 설득에 기반한 체제이고, 대화와 설득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 공간을 공론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고대 그리스 이래, 시민들은 특정 공간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고, 그 결과가 여론이 되었다.

하버마스는 1962년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발표, 공론장 논의 발전에 기여했다. Habermas, J. (1989).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T. Burger, Trans., with assistance of F. Lawrence). Cambridge, MA: MIT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62) 하버마스는 문자해독의 확산과 더불어, 18세기 유럽에서의 사회적 조건이 카페와 살롱 같은 공간을 발전시켰고, 바로 이 공간에서 문자를 깨우친 시민들이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논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공간을 부르주아적 공론장 “bourgeois public sphere”이라 불렀다.

하버마스적 공론장은 시민 사회와 국가 사이를 중개해주는 영역이며, 여론이 형성되는 사회생활의 영역이다. 그 사례들은 18세기 프랑스의 살롱, 영국의 커피하우스, 독일의 탁상사회 였다.  

그에 따르면, 이 공간들에서는 토론 참여자의 상대적 신분보다는 주장의 질이 결정적이었고, 여론과 정치적 행동의 기초를 형성했다. 공론장의 토론에 참가하는 주체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공론장에 참여하는 개인은 지위를 불문하고,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둘째, 어떤 주제도 공론장에서 토론할수 있었다. 셋째, 전문성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론장에서 참여자의 평등성, 토론 주제의 무한성, 개방성 등이 보장되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은 주로 18세기 유럽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하지만, 아담 폭스의 1997년 연구, 엘리자베스와 초기 스튜어트 왕가 시대 영국에서의 소문,뉴스 그리고 대중의 정치적 의견에 따르면, 공론장은 17세기초 영국의 시골 마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ADAM FOX (1997). RUMOUR, NEWS AND POPULAR POLITICAL OPINION IN ELIZABETHAN AND EARLY STUART ENGLAND. The Historical Journal, 40, pp 597-620]

아담 폭스에 따르면, 17세기초 영국에는, 주요 도로에 위치한 많은 여관들, 여인숙 그리고 선술집들이 뉴스의 흐름을 모으고,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1636년, 영국 시골의 선술집 수는 최소 25000-26000개 였다고 추정된다. 바로 이같은 공간에서, 이야기 보따리를 가진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사람들에게 뉴스를 말로 전했고, 사람들이 만나서 시사 문제에 대해서 논의했다. 가령, 1580년대 옥스퍼드셔의 대딩턴에 있는 존 웰치맨이 운영한 선술집에서는 주인이 그가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모은 정보들을 서로 교환하는 것을 장려했다. 주인은 몇몇 뉴스를 듣기를 열망하는 유로 손님들에게 뉴스를 전단했다. 런던 발 뉴스들을 알기 위해서 당시 영국인들은 최신 뉴스들을 접할 수 있는 선술집이 어디인지 알아야만 했다. 영국 당국이 이같은 선술집들을 반란의 요람으로 간주했던 것은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 영국 민초들이 국가의 일을 논쟁했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국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고, 몇몇 손님들은 과음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기도 했다.

존 웰치맨의 선술집 같은 곳은 구두 이야기가 회자되는 곳이자, 중요한 뉴스 집산지이기도 했다. 이곳은 또한 지방의 사설 우체국 역할을 했고, 편지 배달꾼들이 들러서 편지를 맡겼다. 지방의 젠트리들은 런던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보고를 접했고, 수도 런던에 사는 친구들의 개인 편지들을 통해서 국가 중대사에 대한 뉴스를 전달받았다. 1593년 4월, 윌리엄 스터렐은 토마스 펠리페에게 뉴스가 편지를 통해서 충분히 전달되다고 편지했다. 뉴스 편지의 전달을 위해서 전문 배달꾼과 떠돌이 상인들이 고용되기도 했다.  


- 당시 영국 공안당국의 시각에서 보면, 영국 지방의 선술집,여인숙 등은 각종 소문,괴담의 진원지였고,
17세기 영국의 SNS 였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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