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욤 키푸르 전쟁을 막지못한 이유는?" Le monde

"핵보유국이 패전에 몰리면 반드시 핵무기를 사용할까?"


<좌로부터 우로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 로저스 국무장관, 닉슨 대통령>

[외교사]
[욤키푸르 전쟁]
[이스라엘][이집트]
[미국][닉슨][키신저]



1973년 10월의 욤 키푸르 전쟁과 관련된 외교사적 쟁점들 중 하나는 왜 전쟁을 막는데 외교적으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이다. 

수차례의 어긋난 기회들이 있었다고 한다. 나세르 생전에도 1969년,1970년 미국 국무장관 로저스의 제안이 있었지만, 키신저와 닉슨이 이를 폄하했다. 이후에도 1971년초, 유엔 사무총장 특사인 야링의 중재노력, 1971년 2월 4일 사다트의 임시적 운하 타협안, 1972년 7월 사다트가 소련 고문단을 추방시킨 사건 그리고 1973년 2월 키신저와 사다트의 안보보좌관 하페즈 이스마일 Muhammad Hafez Ismail간의 첫번째 접촉이 있었지만, 결실을 맺는데 실패했다. 

중동 분쟁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중재 노력이 실패한 원인들 중 하나에는 미국 국무부와 백악관간의 입장차가 지적될 수 있다. 미국 국무부의 중재 노력이 백악관 고위층, 즉 키신저와 닉슨의 결정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중재외교의 걸림돌인 인간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와 국무장관 로저스간의 개인적 관계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닉슨 정권 초기에 중동분쟁 중재를 담당한 것은 국부무의 로저스였다. 하지만 로저스는 미국 외교정책의 중요의사 결정과정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로저스가 대외문제에서 활약하지 못한 배경에는 닉슨이 당선자 시절부터 국무부에 대해서 비판적이었고, 주요 외교,안보 문제를 백악관에서 직접 다루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닉슨은 국무장관이 정책결정자가 아니라, 협상자가 되기를 원했으며, 정책결정은 닉슨 본인과 백안관 안보보좌관 키신저가 담당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로저스의 불운이자 중동평화를 위한 불운은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바로 헨리 키신저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주요 외교문제를 결정한 것은 닉슨-키신저 라인이었고, 로저스는 주요 문제 결정과정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즉 실세가 키신저였다는 것이다. 중동 평화를 위한 국무부의 계속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는 백악관 고위층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당시 키신저와 닉슨의 주요 관심사는 베트남,중국,소련이었다. 물론 위험하기는 했지만 중동문제는 부차적이었다. 

1971년초 아랍과 이스라엘 양측이 각종 평화안을 제시하고 있을때, 백악관은 베트남,중국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고, 중동은 부수적인 사안에 불과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위원이었던 해럴드 손더스 Harold Saunders 에 따르면, 만약 백악관이 욤 키푸르 전쟁 이전에 전쟁 이후 만큼의 관심을 보였다면, 전쟁을 막을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쟁 이전에 워싱턴은 그같은 시간을 내지 못했다. 1972년 2월의 중국 개방, 1972년 5월 미소관계 안정화, 1972년 11월의 미국 대선, 1973년 1월의 베트남전 종결이 백악관 고위층의 주요 관심 사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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