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스만 침공에서 케네디가 배운 것은?" Le monde

케네디, 피그스만 침공에 대해...

<쿠바 남부의 피그스만>


[정보 실패]
[케네디][CIA]
[피그스만 침공]

위키백과에 따르면, 피그스만 침공 Bay of Pigs Invasion 이란 1961년 4월 17일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미국이 훈련한 1400명의 쿠바 망명자들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쿠바 남부를 어설프게 공격하다 실패한 사건이다. (1961년 4월 17일-4월 19일)

작전 시작

1959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무장투쟁을 통해서 권력에 올라, 쿠바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켰다.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를 믿지못했고, 그와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관계를 의심했다. 대통령 취임 이전에 케네디는 아이젠하워 정권 시절부터 CIA가 추진해온 계획, 즉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시켜서 본토를 침공하게 한다는 작전계획을 보고받았다. 이 계획에 따르면, 쿠바 민중과 일부 쿠바군이 침공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침공의 목표는 카스트로의 전복이었고, 미국에 우호적인 비-공산주의 쿠바 정권 수립이었다.

훈련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60년 3월 이 작전을 승인했다. CIA는 과테말라에 훈련소를 세우고, 11월 침공과 게릴라전을 위한 소규모 부대를 훈련시켰다. 호세 미로 카르도나 José Miró Cardona가 미국의 쿠바 망명자들을 지도했다. 카르도나는 옛 카스트로 정권 인사로, 그는 쿠바 혁명 평의회 의장이었다. 카르도나는 만약 침공이 성공한다면, 쿠바 임시 대통령이 될 것이었다. 

침공계획을 비밀로 유지하려는 미국 정부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쿠바 망명객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쿠바 정보부의 첩보를 통해서, 카스트로는 1960년 10월초에 과테말라의 게릴라 훈련소의 존재를 파악했고, 언론도 사건을 광범위하게 보도했다.

취임 직후인 1961년 2월, 케네디 대통령이 침공계획을 승인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지원을 숨기기로 결정했다. 피그스만이라는 상륙지점도 기만의 일부였다. 이 장소는 쿠바 남부 해안의 멀리 떨어진 습지 지대였고, 심야의 상륙으로 미미한 저항 속에서 상륙을 기대할 수 있었고, 미국의 개입 사실을 숨기게 만들수 있었다. 하지만 상륙지점은 만일의 경우 사태가 악화될 경우, 침공군의 은신처가 될 쿠바의 에스탐브레산 Escambray Mountains 에서 8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다.

계획

원래 작전계획에는 쿠바 공군 기지에 대한 2회의 공습이 예정되어 있었다. 1400명의 침공군은 심야에 상륙할 예정이었고, 기습을 전개할 것이었다. 상륙 이전에 낙하산병이 미리 낙하해서 후방의 교통 및 쿠바군을 교란할 예정이었다. 동시에, 소규모 부대가 쿠바의 동쪽에도 상륙, 혼란을 유발할 예정이었다. 

그 동안, 주력 부대가 마탄자스까지 진격, 방어 거점을 확립할 예정이었다. 연합 혁명전선이 플로리다 남부에서 지도자를 파견,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이었다. 작전의 성공은 쿠바 민중이 침공을 지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침공

최초의 재난은 1961년 4월 15일에 있었고, 쿠바 비행장을 폭격하기 위해서 8대의 폭격기가 니카라과를 떠났을때 발생했다. 미국 CIA는 구식의 제2차세계대전 때의 B-26 폭격기를 동원했고, 쿠바 공군 소속인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도색했다. 하지만 폭격기들은 주요 목표를 벗어났고, 대부분의 카스트로 공군은 피해를 받지 않았다. 공격 소식이 알려지자, 다시 도색된 미국 폭격기 사진이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침공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케네디 대통령이 2차 공습을 취소했다.

4월 17일, 2506 여단이라 불리던 쿠바 망명객 침공군이 피그만에 상륙하자 마자, 쿠바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쿠바 비행기들이 침략군을 맹공했고, 두척의 호위선이 침몰했고, 침공군측 공중 지원부대 절반이 격파되었다. 악천우도 침공군을 괴롭혔고, 침공군으로 완전히 젖은 장비와 탄약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쿠바의 반격

침공 24시간만에 카스트로는 쿠바군 2만 병력에게 해안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고, 쿠바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4월 19일 새벽에 공중지원 작전을 승인했다- 6대의 미군 표시가 되지않은 전투기들이 B-26 폭격대 호위를 위해서 출격했다. 하지만 폭격기들은 늦게 도착했고, 이는 아마도 니카라과와 쿠바간의 시차를 혼동한 것에서 비롯된 착오였다. 폭격기들은 쿠바 공군에 의해 격추되었고, 그날 늦게 침공이 격퇴되었다.   

몇몇 침공부대원들은 바다로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죽거나 포위당하고, 쿠바군의 포로가 되었다. 대략 1200명의 침공군이 항복했고, 1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여파

2056여단 포로들은 이후 20개월 동안 쿠바에 억류되었다. 그동안 미국이 석방을 위해서 피델 카스트로와 협상했다.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가 석방을 위한 조건으로 의약품과 이유식 제공을 제안했고, 카스트로가 포로 석방의 대가로 530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이유식을 받기로 하면서 협상이 타결되었다. 

1962년 12월 23일, 쿠바 미사일 위기가 종식된지 2달이 지났을때, 포로를 실은 첫 비행기가 미국에 착륙했다. 

피그스만 침공의 교훈과 케네디

침공 실패 직후,케네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고 알려져 있다.


"CIA를 박살내서 날려버리고 싶다."

- 사건 직후 정부 각료 한 사람에게...

"아주 끔찍한 방법으로 교훈을 주는 군. 하지만 이 사건으로 하나를 배웠지.반드시 CIA를 손봐야 한다는 것이지.지금까지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했어."

- 아서 슐레진저에게 한 말...

실제로 침공 실패 책임을 지고,앨런 덜레스, 당시 미국 중앙정보부 부장이 파면되었다.

2001년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쿠바에서 열린 피그스만 침공 사건 국제회의에 따르면,당시 관련자들의 증언들과 비밀이 해제된 사건관련 문서들을 참고해 보면, 덜레스 CIA 국장이 침공을 통해 미국을 쿠바와의 분쟁 속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났다고 한다. 즉, CIA는 침공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임기 초반의 풋내기 젊은 대통령이 수모를 당하기 않기 위해서 이 침공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 가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케네디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그들은 나같은 신출내기 대통령이 흥분하거나 체면을 위해서 무분별한 행동을 할 것이라 생각했겠지 . 그랬다면, 나를 완전히 잘못 본거야!"

결국 케네디가 피그스만 침공 사건에서 얻은 교훈은 다음과 같았다.

"군이나 정보당국의 소위 전문가들이란 결코 믿을 게 못된다."

"나의 후임자에게 맨 처음 충고로 이렇게 말해 줄 생각이요. 장군들을 예의 주시할 것! 단지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군사 문제에 관한 그들의 의견이 행여 무슨 값어치 따위가 있을 것이라는 감상에 젖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덧글

  • Let It Be 2013/11/22 13:44 # 답글

    전쟁은 외교관에게!
  • 파리13구 2013/11/22 13:45 #

    ^^
  • 지나가던과객 2013/11/22 15:56 # 삭제 답글

    케네디가 신출내기지만 2차대전 참전용사인데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니.....
  • 파리13구 2013/11/22 16:06 #

    흐루쇼프,아이젠하워,덜레스 모두 케네디를 애송이 취급했다고 합니다. ㅠㅠ

    2차대전 때로 돌아가보면,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최고 반열에 있었지만, 당시 존 케네디는 하급 장교에 불과했습니다.
  • 피그스만 2015/11/14 13:48 # 삭제 답글


    피그스만 정보실패와 관련된 논문이나 자료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공부중인대 관련자료가 너무 부족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6 대표이글루

2015 대표이글루

2013 대표이글루

2011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9 대표이글루_역사

방문자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