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3세의 외교적 고립은 자업자득! Le monde

비스마르크,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19세기 외교사]
[프랑스]
[나폴레옹 3세]
[비스마르크]



19세기 중반 유럽의 국제정세에서 비스마르크는 다음과 같은 격언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정치가 다음의 원칙으로 귀결된다 : 세계가 5대 열강간의 불안정한 균형에 의존하는 한, 3개국이 가담한 진영의 일원이 되도록 노력해라!"
 
"All politics reduces itself to this formula: try to be one of three, as long as the world is governed by the unstable equilibrium of five great powers."

그렇다면,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나폴레옹3세는 어떤 행보를 보여주었을까?

다음은 헨리 키신저의 지적이다.

황제의 정책은 주로 기이했고, 변덕스러운 성격이 지배적이었다.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족으로, 그는 프랑스의 국가이성이 무엇이든 간에,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에서 편안함을 결코 느끼지 못했다.1858년 나폴레옹은 피에몬테 외교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생생한 혐오감을 느낀다." 혁명 계획에 대한 그의 애호는 1859년에 이탈리아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게 만든다. 나폴레옹은 유럽 국경을 다시그리기 위한 유럽회의를 반복적으로 제안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쟁 이후 니스와 사부아를 병합하면서 영국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의 고립을 완성시키는 의미에서, 나폴레옹은 1863년의 폴란드 봉기를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 가능성을 희생시켰다. 민족자결주의라는 기치아래 유럽외교를 혼란상태로 몰아간 나폴레옹은 어느순간 갑자기 스스로 고립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대부분 원인이 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갔고, 그 결과, 독일 민족이 유럽에서의 프랑스 우위를 끝장내는 것을 실현하게 되었다.

-키신저,외교, 110쪽     


- 1870년의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외교적 고립상태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특히 러시아가 개입하지 않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심지어 러시아는 무력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아주기까지 했다.

나폴레옹3세의 외교적 실정의 결과로 확정된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 구도는 1894년 1월의 노불동맹 탄생 이전까지 계속되었고, 프랑스에게 외교적 멍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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