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3세 외교가 어떻게 프랑스의 악몽이 되었나? Le monde

비스마르크,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나폴레옹3세의 죽음, 1873년>

[외교사]
[19세기 유럽]

<나폴레옹3세와 그의 시대
- 빈 체제와 비스마르크 체제>

19세기 유럽 외교사는 4개의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빈 체제(1815-1853년) 빈 체제의 붕괴(1853년-1871년) 비스마르크 체제(1871년-1894년) 그리고 비스마르크 체제의 붕괴 및 제1차세계대전(1894년-1914년)

1815년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 체제가 성립한 이후 40년간 유럽 강대국간의 전쟁은 없었다. 하지만 1853년 러시아와 영국,프랑스,사르데냐,오스만 제국이 충돌한 크림전쟁이 발발하면서 빈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전쟁에서 빈체제의 두 주축이었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특히 러시아가 패전을 통해 유럽무대에서 잠시 사라지게 되면서 빈체제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크림전쟁에 대한 나폴레옹3세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크림전쟁에 임하면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3세는 주요 목표로 다음을 제시했다 : 기존 국제 질서의 붕괴, 그리고 국제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결성된 동맹의 분열.

1856년 3월, 최종 평화협상 과정에서, 나폴레옹3세는 휘하 각료들에게, 나폴레옹 전쟁이후에 탄생한 빈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이간질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동맹이 유럽협조체제와 함께 우리에게 위협이 되며, 우리의 행동의 자유를 강탈해 갔다. 전쟁에서 우리의 주된 목표는 두 세력을 분리시켜, 프랑스가 해외에서 행동의 자유를 다시 가지게 만드는데 있다."

크림 전쟁 결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양국이 약화되었고, 이같은 힘의 공백 사태를 프랑스의 나폴레옹3세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하려 했다. 두 사람은 모두 빈 체제의 균열에서 각각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려 노력했다. 

크림 전쟁 이후 대략 20년동안 빈 체제가 붕괴되면서 유럽에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전쟁 1859년 - 오스트리아에 대한 피에몬테와 프랑스의 전쟁, 폴란드 봉기 1863년, 덴마크 전쟁 1864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오스트리아-프로이센전쟁 1866년, 보불전쟁 1870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1871년 이후 비스마르크 체제가 탄생하면서 제1차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43년동안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은 없었다. 

그 중에서 1871년-1894년 동안의 시기는 비스마르크 체제라 분류한다. 

1871년-1894년의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Bismarck’s system of alliances 는 독일 통일의 성과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 통일을 위해, 일련을 전쟁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던 비스마르크는 일단 통일 달성되자, 유럽 최고의 평화 옹호자가 되었다. 이는 독일 통일의 성과가 다른 전쟁으로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 이를 위해서, 비스마르크는 "정직한 중개자 honest broker"가 되고자 했다. 이렇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유럽의 강대국들과 복잡한 동맹관계를 구축했다.이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였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최대 목표는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을 유지시키는 것이었고, 노불동맹 FRANCO-RUSSIAN ALLIANCE 과 유사한, 악몽과 같은 反독일 포위 동맹 "Nightmare Coalition" 의 결성을 막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1879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동맹 결성 the Dual Alliance between Germany and Austria-Hungary으로 시작했다. 그는 이 동맹에 이탈리아를 추가시켜서, 1882년의 3국동맹 the Triple Alliance 을 결성했다. 영국과는 1887년의 지중해협정을 통해 아드리아 해, 에게 해, 흑해를 포함한 지중해에서의 현상유지에 합의했다. 이 지중해 협정은 프랑스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동맹 결성 가능성이 높았던 러시아와 1887년 재보장 조약 reinsurance treaty 을 체결했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하에서 프랑스가 동맹국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하지만 1890년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독일의 빌헬름2세가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 연장을 거부하면서, 러시아가 프랑스 고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이탈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은 유럽에서 고립 중이던 프랑스와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이탈한 러시아가 체결한 1894년 1월의 노불동맹이었다. 노불동맹의 탄생과 함께, 비스마르크 체제는 붕괴했고, 유럽은 프랑스-러시아 동맹 대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3국동맹 진영으로 양분되었고, 이같은 대립구도하에서 발생한 것은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나폴레옹3세의 집권>

나폴레옹3세의 통치기는 역사상 빈 체제의 붕괴기라 분류하는 1853년-1871년과 대략 일치한다. 황제는 프랑스에 커다란 치욕을 안겨준 1815년에 탄생한 빈체제를 파괴하면서, 다시 한번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실추된 프랑스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자!”가 그 구호였다. 하지만 나폴레옹3세의 외교는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기는 커녕, 프랑스를 점점 고립시켰고, 프랑스를 재앙으로 몰아갔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년 4월 20일 ~ 1873년 1월 9일)는 최초의 프랑스 대통령이자 두 번째 프랑스 황제이다. 프랑스의 마지막 세습군주이기도 하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자 의붓외손자로 1848년에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새로운 공화국에서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1848년 12월) 쿠데타(1851년)를 통해 제2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1852년)

그에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자체가 중요했고, 아마도 루이 나폴레옹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자산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또한 숙명적인 정치 유산이었고, 영광과 제국의 새 시대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높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나폴레옹3세는 대외정책에서 3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1. 그는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영국은 그의 삼촌,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성공의 주된 걸림돌이었다. 그는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영국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해서, 그의 대외정책의 성공을 용이하게 하려했다.

2. 그는 자신의 대의를 위해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려 했다. 민족주의의 잠재적인 힘은 그의 삼촌도 인정했지만, 보나파르트는 이것을 이용하는데 실패했다. 나폴레옹3세는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독립을 원하는 민족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려 했고, 이들 민족들을 지원하여,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프랑스의 정치적,도덕적 주도하에, 유럽을 재편하려 했다.

3. 민족들과의 긴밀한 유대 속에서, 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탄생한 국제질서를 파괴하려 했고, 이를 통해 프랑스가 유럽에서의 패권을 부활에 방해되는 주요 장애물을 제거하려 했다.


<이탈리아 전쟁>

크림 전쟁 직후 빈 체제의 균열 조짐이 재확인된 것은 1859년 이탈리아 전쟁에서 였다. 크림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의 고립,약화를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카부르는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한 기회로 보았다. 1815년의 빈체제 하에서 오스트리아는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은 바 있었다. 오스트리아 약화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호기였고, 이를 위해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군사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대항하는 비밀단체에서 활동했던 나폴레옹3세는 프랑스가 유럽 각지의 억압받는 민족들의 민족주의를 지원, 이들을 주도하여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만큼, 프랑스의 이탈리아 민족주의 지원은 논리적 수순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탈리아 개입을 통해 실제로 얻을 것은 거의 없었다. 만약 그것이 성공한다면, 이탈리아에 프랑스의 전통적인 침공로상에 놓인 지역에 더 강한 국가가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이는 개입 목표의 모호함에 대한 비난과 함께, 굴욕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성공이든 실패이든, 이탈리아에서의 프랑스군의 존재는 유럽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개입이 유럽 외교관들을 놀라게 만들동안,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전쟁을 예상하며, 이 전쟁으로 독일에서의 오스트리아의 지위가 약화될 것이라 기대했다.

나폴레옹3세가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과 힘을 합쳐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려는 전쟁에 돌입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였다. 하지만 1859년 6월 솔페리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이탈리아가 프랑스 세력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프로이센이 무력 개입을 위협했고, 이에 당황한 프랑스가 이탈리아측과의 사전 협의없이 단독으로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체결, 카부르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이 평화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를 사르데냐에 넘기는데 동의했지만,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령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쟁의 개입의 대가로 프랑스가 니스와 사부아를 양도받자,이는 영국에게 나폴레옹1세 시절의 프랑스 패권주의 부활 신호로 인식되었고, 영국의 반감을 고조시켰다.

<폴란드 봉기>

또한 나폴레옹3세는 러시아에 대항한 1863년 폴란드 봉기에 대한 공개적인 동정을 표시했고, 이것이 러시아를 격분시켰다. 반면,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폴란드 봉기를 비난하고, 러시아의 진압을 지원하면서 러시아의 호감을 샀다. 이렇게 폴란드 봉기에서 나폴레옹3세는 러시아의 반감을 얻었고, 비스마르크가 러시아의 호감을 얻었던 것이 이후의 국제관계에서 결정적이었다.  폴란드 위기 동안의 프로이센이 보여준 일관된 러시아 지지에 대한 고마움이 독일 통일 전쟁에서의 러시아의 프로이센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러시아의 친-프로이센 노선은 나폴레옹3세에게 치명적인 것이 될 것이었다.

<독일 통일전쟁>

나폴레옹3세 외교정책의 다음 무대이자 최종 실패가 결정된 것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독일 통일전쟁이었다. 프로이센은 덴마크와의 1864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을 통해서 독일에서의 프로이센의 패권을 확립해나갔다. 

나폴레옹3세는 이를 어떻게 보았을까? 라인강 너머의 독일을 분열된 상태로 두는 것은 17세기 리슐리외 이래의 프랑스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리고 독일의 분열과 독일에서의 프로이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우위는 빈 체제가 보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프랑스적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의 빈체제 파괴를 백안시했던 나폴레옹3세의 독일정책의 결과는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통일이었다. 이는 프랑스에게 라인강 동쪽으로부터의 안보,군사상의 위험을 제공했고, 프랑스는 1870년 보불전쟁,1914년 제1차세계대전,1940년 제2차세계대전에서 분열된 독일의 상실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독일통일 과정에서의 나폴레옹3세의 관심사는 강한 독일 탄생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전쟁에서의 중립의 대가로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1865년 10월의 비아리츠 회담에서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3세에게 프랑스의 영토확장을 지지한다고 약속하면서, 프랑스의 불개입을 약속받았고, 뿐만아니라 프랑스의 영토확장에 대해 우려하던 영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비스마르크는 독일통일 전쟁에서의 프랑스의 중립을 보장받으면서, 동시에 프랑스와 영국 관계를 악화시키는 묘수를 실행했던 것이다.

<보불전쟁>

1870년 독일 통일을 완성시킨 보불전쟁이 발발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였다. 나폴레옹3세의 프랑스는 계속된 대외정책의 실정으로 외교적 고립상태에 있었다. 영국은 이탈리아와 벨기에,룩셈부르크에서의 프랑스의 팽창주의를 의심했다.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차에, 나폴레옹3세가 1863년 폴란드 봉기를 동정하자 분노했다. 러시아도 분명 독일의 분열에 의해서 동유럽 진출이라는 이익을 볼수 있었지만, 보불전쟁에서는 나폴레옹3세의 실정과 비스마르크의 친러정책 때문에, 불개입 결정을 내렸고 이는 프로이센 승리에 결정적이었다. 덕분에 프로이센은 양면전쟁의 위험없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전력을 집중할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보불전쟁에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866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의 패배로 프로이센에 대한 복수를 노리던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가 무력을 동원 불개입을 압박했던 것이다. 1870년 7월 14일, 러시아가 비스마르크에게, 오스트리아가 동원령을 선포할 경우,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기위해서 그리고 독일이 한 개의 전선에서만 싸우게 만들기 위해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인 갈리치아에 30만 대군을 파병할 것이라 약속했다. 뿐만아니라, 러시아는 덴마크에게도 중립을 지키라고 압력을 행사할 것이라 약속했다.  

<나폴레옹3세의 유산>

나폴레옹3세는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프랑스 패배 결과로 탄생한 빈체제를 파괴하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3세는 독일에 대한 빈체제의 원칙, 즉 독일 연방 구성으로 인한 분열된 독일의 지속과 독일에서 프로이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원칙이 리슐리외 이래의 프랑스의 독일 정책, 즉 분열된 독일을 유지한다는 원칙에 부합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연방은 방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프랑스 안보에 커다란 위협이 아니었다. 독일연방 해체의 결과는 리슐리외적인 분열된 독일이 아니라, 통일 독일이었다. 통일 독일은 프랑스를 인구수로 압도했고, 그 산업 능력은 곧 프랑스를 초월하게 될 것이었다. 빈체제를 파괴하면서 나폴레옹3세는 방어적인 독일연방을 없애고, 통일 독일이라는 공격적 위협을 지정학적 유산으로 남겼다.  

그리고 나폴레옹3세의 외교적 실정의 결과로 확정된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 구도는 1894년 1월의 노불동맹 탄생 이전까지 계속되었고, 프랑스에게 외교적 멍에가 되었다. 

나폴레옹3세의 외교는 프랑스의 직접적 국익과 무관한 영광의 실현을 위한 이상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이탈리아와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빈 체제의 몰락에 따른 유럽 국가 세력관계의 재편과정에서 프랑스의 장기적인 국가전략과는 무관한 니스,사부아,벨기에,룩셈부르크 같은 영토획득에 관심을 가지면서 영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장기적인 외교전략도, 외교정책의 일관성도 없었고, 그 결과 아무 생각없이 단기적 이익을 취하려 노력하다가 장기적 이익에 치명타를 가하는 소탐대실의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특히, 벨기에,룩셈부르크를 차지하기 위해서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이라는 프랑스의 동쪽 국경 안보에 대한 항구적인 위협에 대해 우유부단하게 대처했다는 점이 특히 뼈아픈 실책이었다.

결국 나폴레옹3세는 빈체제를 파괴하기를 원했지만, 그 결과로 탄생한 비스마르크 체제는 프랑스 안보를 오랫동안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악몽은 비스마르크 실각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될 정도로 끈질긴 것이었다.



덧글

  • 2013/10/14 20:43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파리13구 2013/10/14 20:46 #

    감사합니다.

    수정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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