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모택동 그리고 스탈린! 유럽외교사


<스탈린과 모택동>

스탈린,장개석,모택동


1945년 8월 14일, 장개석의 중국과 스탈린의 소련이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한 것을 보면, 당시의 스탈린,장개석,모택동간의 관계를 알수 있다.


특히, 국공내전에서의 모택동의 승리 이전까지의 스탈린과 모택동간의 불화가 주목된다. 소련과 중국 공산당은 모두 공산주의를 표방했지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보는 입장차이가 존재했다. 스탈린은 모택동의 맑스주의 해석,즉 농민을 혁명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전술이 진정한 혁명적 맑스주의가 아니라고 보았고,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들이 계급 전쟁을 이끄는 것이 진정한 맑스주의라 보았다. 사실, 스탈린은 마오의 중국혁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수백만명의 굶주린 농민들은 봉기는 사회주의 혹은 민주주의 운동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a rising of millions of starving peasants had nothing in common with a socialist or democratic movement


이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입장 차이 뿐만아니라, 스탈린이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은 다른 이유들도 존재했다.


- 모택동이 공산주의 세계의 패권 경쟁자로 부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 냉전이 아시아로 확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 중국 공산당을 폄하하고, 국민당을 과대평가해서, 심지어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불가피한 순간에 조차도,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당 정권에게 협력하라고 강요한 것,


모택동은 스탈린이 중국의 분열을 원했고, 중국을 약하게 만들어, 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우세를 유지한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는 스탈린의 외교정책이 순수한 혁명 이론이 아니라, 편협한 국익에 기초한 것이라 보았다.


이렇게 스탈린은 이데올로기와 힘의 논리가 서로 모순될때, 거의 항상 힘의 논리를 선택했다고 한다.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이 제2차세계대전과 그 직후,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을 지원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한다. 즉 대외정책에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세력균형 논리를 적용시킨 것이었다 :


"중국 공산당과 갈등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따라서 스탈린은 장개석을 진보적인 세력으로 보았다. 일본이 동쪽에서 우리의 주적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장개석을 지원하는 것이 국익과 일치했다.

물론 우리가 그를 지원한 것은 그가 일본에게 패배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이는 처칠의 논리와 유사했다. 처칠은 소련 초기 부터 우리의 적이었지만.,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우리를 지원하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정책에서, 스탈린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더 강하고, 더 발전된 것으로 보이는 국민당의 장개석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1949년말까지.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에게 내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피하기 위해서 양자강에서의 세력 확산을 자제하고, 국민당과 협상하고, 연정을 통해서 국민당 주도의 국가건설 과정에 참여하라고 조언했다. 더 과거인 1926-1927년, 스탈린은 공산당에게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요구했고, 이는 외세 제국주의와의 투쟁과 신중국 국가 건설을 위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이 자신의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을때도, 스탈린은 "우리는 국민당 우파가 필요하다. 우파에는 군을 지도할 인물들이 있고,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그들의 지휘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중국 공산당에 대한 스탈린의 조언은 대체로 재앙으로 귀결되었다 : 1927년 4월,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을 공격, 대량 체포하고, 그 지도자들을 학살했다. 이 재앙으로 인해, 이후 거의 10년동안 공산당은 중국에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중국에서의 자신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를 원했다 : 그는 지역 공산당의 이익이 소련의 국익에 종속되도록 강요하기를 원했다. 그는 또한 중국을 과거와 같이 분열되고 약한 국가로 유지하기를 원했고, 이는 만주,여순,대련에서의 소련의 특권의 유지와 중국에서의 다양한 소련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였다.


중국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관점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어떤 사태전개가 중국에서의 소련의 국익을 위해 최선인가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에 대해 승리를 거둘 것이라 믿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까운 공산당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소련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거리가 먼 국민당과의 관계를 지속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그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직접 지원을 꺼렸고, 이는 당시 북 중국으로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던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산당에게 국민당에 협력하라고 권고했을 뿐만아니라 스탈린의 소련은 국민당의 최대의 동맹이었다. 소련이 곧 극동에서의 일본에 대한 전쟁에 개입한다는 정보를 파악한 장개석은 스탈린과의 협상 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45년 7월초, 중국 외무장관 송자문 宋子文 Tse-Ven Soong이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과 회담했다. 스탈린은 장개석을 중국의 유일 지도자로 인정했고, 중국 공산당을 돕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국민당에게 몇개의 중요한 양보를 요구했다. 스탈린의 요구 조건이 가혹했음에도, 장개석은 송자문에게 1945년의 중소 우호동맹 조약 the 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 체결을 지시했다.   


이 조약을 통해, 장개석은 외몽골의 독립, 소련의 여순 항 군사점령, 중국 장춘 철도에 대한 소련의 특권 등을 인정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소련은 장개석이 중국내의 유일한 합법 정부의 지도자임을 인정했고, 장개석의 군대가 중국 북동쪽의 잃어버린 영토를 재점령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이같은 장개석-스탈린 동맹이 중국 공산당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에게 장개석과 협상에 나서라고 압박했다. 8월 20일-22일,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일본의 항복에 따라, 전후 평화와 재건을 위해 공산당이 이제 국민당과의 대화에 나설 때가 되었다고 강조하는 전문을 보냈다.


국민당과의 협력을 통해서, 스탈린은 만주에서의 다양한 이익을 확보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것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소련과 국민당이 장춘 철도 관련 경제협력 문제를 두고 충돌했을 때에도, 소련은 국민당에게 외교적 비난을 가하면서도, 공산당의 희생을 강요했다. 결국, 공산당은 장춘 철도 주변의 모든 도시들을 국민당에게 넘겨주고, 철수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덧글

  • 갈천 2013/04/01 15:51 # 삭제 답글

    1. 원래 손문,장개석의 국민당은 1914년 창당이후 1917년의 러시아 공산당과 깊은 관계를 유지 하여왔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당했죠.

    소련,중공이라는 국가의 군대가 정부가 아닌 공산당에 속해 있듯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군대도 정부가 아닌 국민당에 속해있었던 적이있고,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도 모스크바 유학, 소련 공산당의 보호하에 있었습니다.

    2. 1924년인가 손문의 국민당의 제1기 전국대표회의에는 공산당 대표로 모택동이 참가했습니다. 소련은 중국 공산당더러 1차 국공합작을 권유하고, 국민당에 가입하라고 했는데, 공산당원들은 당적을 유지하면서 국민당원이 되는 이중신분이었습니다. 국민당 내에 공산당이 존재하는 형태였지요.

    자연히 국민당내의 원본 당원들과 공산당출신 당원들간에 갈등이 폭발하였고 장개석은 1927년 상해사변을 일으켜 공산당을 기습공격하면서 국공합작이 깨졌습니다.


    3. 소련이 중국 장개석과 1945년8월 중소우호조약을 체결한 것은 1945.2월 얄타협정의 약속을 이행한 것입니다. 미국,영국이 소련의 대일참전 댓가로 만주에서의 소련의 이권을 보장하되 장개석을 중국의 통일국가정부로 인정하라는 조건이었습니다.
  • 파리13구 2013/04/01 15:53 #

    감사합니다...
  • 솔까역사 2013/04/01 19:27 #

    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에 국민당이 낚였다고 배웠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듯합니다.
  • 파파라치 2013/04/03 01:40 # 답글

    그리고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의 주은래가 소련을 방문했을때 스탈린은 그로서는 드물게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대인배의 면모를 과시했죠.
  • 파리13구 2013/04/03 10:23 #

    역시 대인배입니다. ^^
  • 0000 2013/06/02 07:36 # 삭제 답글

    스탈란이 이념보더 자기의 나라 소련의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애 나차 독일의 히틀러와 불거침 조약을 맺고 독소전 직전에는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고, 독 소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영국 미국과 연합하여 나차치독일과 싸운 것애서도 잘 나타납니다.
  • 0000 2013/06/02 07:55 # 삭제 답글

    스탈란이 이념보더 자기의 나라 소련의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의 집권 시기인 1933년에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나차 독일의 히틀러와 불거침 조약을 맺고 독소전 직전에는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고, 독 소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영국 미국과 연합하여 나차치독일과 싸운 것애서도 잘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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