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와 영국-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분노!" Le monde

키신저의 경고...

<사진- 1970년 뮈뤼로아 환초에서의 프랑스 핵실험>

[디엔비엔푸]


디엔비엔푸와 영국-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분노!


베아트리스 호이저 Beatrice Heuser의

덩케르크,디엔비엔푸,수에즈 혹은 프랑스가 동맹국을 믿지않고, 핵무기를 사랑하게 된 이유 라는 글에 따르면,


DUNKIRK, DIÊN BIÊN PHU, SUEZ OR WHY FRANCE DOES NOT TRUST ALLIES AND HAS LEARNT TO LOVE THE BOMB


1954년 3월의 디엔비엔푸 전투의 패전으로, 프랑스는 영미 동맹에 대해서 강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따른 안보 불안 때문에, 핵무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54년 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에서 포위당했을 때, 프랑스군이 포위전에서 이기느냐 아니면 지냐의 여부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승부를 판가름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에 프랑스는 디엔비엔푸를 구하기 위해서 미국에게 핵무기 사용을 요청했다. 불과 몇달전에,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지역 분쟁에서도 핵무기 사용을 불사한다면, 무제한 보복전략 the strategy of massive retaliation 을 공언한 상태였었다. 


프랑스의 지원 요청에 따라, 아이젠하워 정부는 프랑스에 대한 병참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되었지만, 핵우산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덜레스의 무제한 보복은 단지 협박에 불과했고, 특히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미국 정책의 일반 원칙을 공개한 것일 뿐이었다. 당시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공언하면서, 중국이 한국에서 전쟁을 재개하는 것을 막으려했다 ; 하지만 구두로 경고하는 것과 실제로 핵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였다.


이 사건에서 미국의 핵사용 포기에 영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이 인도차이나에서의 핵무기 사용 논의를 위한 3자회담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서, 영국의 거부의사를 표현했다. 심지어, 영국은 미국에게 핵을 사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2년후, 덜레스는 기자회견에서,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 모두가 중국에 대한 핵보복 위협에 동의했지만, 이에 따른 중국의 인도차이나 개입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영국이 이를 포기했다고 증언했다. 이같은 증언에 대해서 영국정부가 부인했지만, 프랑스는 쓴맛을 느꼈다.


결국 1954년 5월에 디엔비엔푸가 함락되었고, 프랑스는 이를 앵글로-색슨의 배신으로 간주했고, 프랑스의 전통적인 반영감정인 "못믿을 영국놈 perfide Albion "신화에, 이제 못믿을 미국놈들이 추가되었다.


프랑스에게 교훈은 분명했다 : 프랑스가 앵글로-색슨이라는 동맹을 믿어서는 안되고, 프랑스는 독립적이어야 하고, 이같은 이유로, 프랑스가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4년 12월, 프랑스 정부 백서는 프랑스가 핵무기를 절실하게 필요로한다고 규정했다 : "어떤 나라도 단기적으로 볼때, 핵무기 없이 진정한 정치적 독립을 주장할 수 없고, 프랑스가 의심의 여지없이 핵탄두와 그 발사체를 보유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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