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파키스탄 관계사 (6) Le monde

미국-파키스탄 관계사 (1)

[테러리즘]
[알카에다]
[미국][파키스탄]
[클린턴][오마르]

 

빌 클린턴이 1993년에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을때, 그는 국내문제에서는 야심이 있었지만, 대외 문제에서는 경험이 부족했다. 하지만 임기 초반, 그는 프레슬러 수정안의 폐해를 수정하려 했지만, 핵확산에 대한 근심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의 첫 국방장관 윌리엄 패리도 파키스탄의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고, 핵 야심을 억제시키고, 테러리즘과의 관련을 차단하고,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완화를 위해서, 프레슬러 수정안이 방해가 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전략 문제 논의를 위해서 이슬라마바드를 방문했고, 프레슬러 수정안의 개정을 위해 의회를 설득했다. 그의 이같은 노력의 결과가 1995년의 브라운 수정안이었다.


패리 국방장관과 브루스 리델이 파키스탄 당국자와의 회담을 위해서 1995년에 호노룰루를 방문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이었다. 파키스탄 대표단은 더이상의 핵개발 계획이 파키스탄을 더 안전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패리의 주장을 경청했다. 이것이 인도와의 군비 경쟁을 촉발시킬 뿐이라는 지적이었다. 이에 대한 파키스탄 장관들의 대답은 프레슬러 수정안에 대한 비난이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탈레반의 성장에 주목하고 있었고, 베나지르 부토 총리는 탈레반이야 말로, 무자헤딘간의 잔인한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미국측에 로비했다. 캘리포니아의 석유회사도 이같은 주장을 지지했고, 아프간의 안정을 위해서 워싱턴이 탈레반과 협력해야 하고, 이를 통해서 중앙아시아 석유가 송유관을 통해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경유, 인도양으로 수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베나지르 총리가 다른 석유회사를 지원하면서, 이것도 양국간의 긴장 요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1996년 9월,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장악했을때, 미국 관리들은 처음에는 그들이 아프간에 법과 질서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했고, 카불에 대사관 개설을 검토했다. 하지만 탈레반이 인권과 여성권을 무시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미국은 포기했다. 미국-아프간 관계의 장래는 이제 클린턴 2기 행정부로 이월 되었다.     


클린턴의 집권2기는 남아시아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었다.


1997년 7월, 국무부 부장관 스트로브 탈보트 Strobe Talbott 가 아프간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 1980년대 아프간 전쟁 시절의 유산과 결별해야 하고,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탈레반과 러시아,이란,인도가 지원하는 북부동맹간의 내전이 종식되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8년 탈-아프간 전쟁 해법 마련을 위해서 미국은 탈레반과의 직접 대화에 나섰다.


당시 파키스탄 총리였던 나와즈 샤리프 Nawaz Sharif (총리 1997-1999) 가 1998년 4월 유엔주재 미국대사 빌 리처드슨이 이끄는 미국대표단의 카불 방문을 주선했다. 리처드슨은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와의 면담과 오사마 빈라덴을 사우디 당국에 넘길 것을 탈레반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탈레반이 이를 모두 거부했다. 그들은 북부동맹 보다는 휴전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리처드슨의 카불 방문은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리처드슨은 샤리프에게 빈라덴 같은 테러리스트와의 관계를 끊고, 탈레반을 설득해서, 빈라덴을 사우디에게 넘기게 하라고 요구했지만, 이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샤리프는 탈레반이 통제불능의 광신도이고, 파키스탄이 그들을 지원하는 것은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빈라덴에 대해서 샤리프는 파키스탄이 그와 어떠한 접촉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빈라덴은 이미 언론에, 자신이 파키스탄정보국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 상태였다. 당시 오사마 빈라덴은 파키스탄의 양대 지하드인 아프가니스탄과 카슈미르에서의 지하드를 지원하고 있었다.


1998년 5월, 인도와 파키스탄의 추가 핵실험으로 파키스탄에 대한 제재가 더욱 강해졌다. 클린턴과 탈보트의 만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샤리프는 인도의 핵실험에 대응해서 핵실험을 실행했고, 이렇게 미국-파키스탄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같은 긴장은 알카에다가 1998년 8월, 탄자니아와 케냐의 미국대사관을 공격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클린턴은 크루즈 미사일 공격을 명령했고, 이는 빈라덴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미사일이 공격한 한 훈련소에서, 빈라덴 대신에, 파키스탄정보국 요원들과 훈련중이던 카슈미르 반군들이 사망했다. 워싱턴의 시각에서, 빈라덴이 있었다는 훈련소에 파키스탄정보국 요원들이 있었다는 것은 빈라덴과 파키스탄군 및 정보국간의 긴밀한 관계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빈라덴과 파키스탄간의 밀접한 관계는 이미 1998년 당시에도 명확했다.


1999년 카슈미르에서의 인도-파키스탄간의 분쟁에 대해서, 클린턴 정부는 파키스탄에게 카슈미르로부터의 완전 철군을 압박했다. 1999년 7월 4일, 클린턴과 샤리프가 만났고, 클린턴은 파키스탄군의 철군을 요구했고, 샤리프가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서 샤리프가 자신의 나라와 인도를 재앙에서 구해냈지만, 파키스탄 군부는 이를 다르게 해석했다. 그들은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고, 격분했다.


파키스탄과 탈레반과의 관계 시정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고조되면서, 샤리프는 아프간에게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청산하고, 알카에다에 대한 유엔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탈레반이 이를 거부했다.


이렇게 탈레반에 대해 환멸을 느낀 샤리프는 당시 유일하게 탈레반 정권을 인정하고 있던, 아랍 에미레이트와 사우디 아라비아를 설득, 아프간에 대한 치명타를 가할 준비를 했다. 동시에 샤리프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참모총장을 해임시켰다.


하지만 무샤라프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2001-2008)가 이에 반발,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고 육군참모총장을 행정부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권을 출범시켰다. 샤리프 정권 전복에 대해서, 미국은 더 가혹한 제재로 대응했지만, 당시 더이상 악화될 양국 관계가 없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지하드가 힘을 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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