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리강화회의에서 영국외교의 입장은?" 유럽외교사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관한 기억 하나"

[파리강화회의]


카, 파리강화회의의 노선은?


카는 파리강화회의가 여러 차원에서 진행되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우선의 국가의 이해와 낡은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수구적 단계였다. 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추구하던 노선이었다.


그 다음 단계는 다음과 같았다.


"이 단계는 자결에 대한 신념을 추구하는 정책 노선으로, 지속적인 영토 해결을 원한다면, 이해 당사자들을 만족시키는 영토 해결이어야만 한다는 합리적 주장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빈회담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이 꾸준히 강조되었다. [1815년 빈회담에서는 유럽 강대국들의 입장을 철저히 반영한 영토 재조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영국과 미국 모두 이런 단계에서 회담을 진행시키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국과 미국 모두 자신의 이해가 달려있는 유럽 이외의 국가들에게 이 원칙을 적용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특히 영국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사정은 영국이 진정으로 말 그대로의 자결이 아닌 약소국들의 권리를 단순히 믿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실제로 강대국에 맞서는 약소국을 지원한다는 전통적인 세력 균형 이론의 유산이자, 신은 약한 군대 편에 선다는 자유주의적 믿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영국이 보건대 1918년이 지나자마자 독일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 지원을 받아야하는 약소국의 자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로카르노에서 단기적으로 승리를 거둔 정책이었다."  


- 카가 아르노 메이어 Arno mayer 에게 보낸 서신

1959년 11월 13일

- 파리강화회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강대국만의 입장을 철저하게 반영한 빈회담과는 달리, 약소국의 권리를 인정하고자 했던 파리강화회의가 탄생시킨 전후세계가 왜 평화가 아닌 혼란과 위기를 거쳐서 전쟁으로 귀결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영국은 파리회의에서 약소국들의 탄생에 기여했지만, 약소국들이 안정적인 발전을 해나가는데는 무관심했고, 동유럽 지역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동유럽에 대한 영국의 불개입 원칙은 1938년 뮌헨회담 직전까지 고수되었다.

이같은 동유럽에 대한 영국의 불개입원칙은 독일이 동유럽에 대한 야심을 키워가는데 일조를 했다.

한편, 1918년 이후 영국이 독일을 대륙에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약소국으로 간주한 것은 프랑스의 독일 정책에 치명타를 주었다. 이같은 독일 정책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 외교의 반목과 모순은 전간기 동안 독일의 성장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이렇게 세계대전으로 옛제국들이 붕괴하면서 동유럽에서 햇병아리 민족국가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햇병아리 보호 부담은 프랑스에게 전가 되었고, 영국은 이 문제에 대한 개입을 꺼렸다.

그리고 햇병아리가 제대로 성장하기도 전에, 독일에서는 늑대가 그리고 소련에서는 여우가 폭풍성장?하게 되었고, 이제 햇병아리들의 생존이 위협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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