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관한 기억 하나" Encyclopedie

지금까지 오랫동안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사학과 교양강의의 기본 교재들 중 하나였다. 나도 이 책을 여러번 읽었고, 읽을 때마다 역사에 대한 카의 식견에 감탄을 보내곤 했다.


나는 카의 이 책에 대한 특별한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때는 90년대 중반이었다. 공안사건으로 구속된 한 선배의 재판을 방청했다. 트로츠키주의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었다.


재판에서 검사가 수사 과정에서 압수한 이적표현물들을 열거하는데, 각종 이념 서적들 가운데, 바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적이 있다.


그날 더욱 박진감 넘쳤던 것은 방청석에 앉아있던 내 손에 들려있던 책이 바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는 점이다. 나는 재빨리 책 제목을 손으로 가리고, 이 책을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담당 검사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장이 문제가 된다고 했다. 그 장의 제목은 "넓어져가는 지평선"이었다. 이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빨갱이의 역사관이라는 것이 당시 검사의 주장이었다.


9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이적 표현물로 간주되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덧글

  • 초록불 2012/12/18 09:48 # 답글

    85년에 저 책을 읽은 저는 검사 논리에 따르면 진성 빨갱이겠습니다...-_-;;
  • 초록불 2012/12/18 09:50 #

    생각해보니 번역자도 우리학교 교수님이었어요...-_-
  • 파리13구 2012/12/18 09:54 #

    초록불님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제가 보장합니다. ^^

    당시 과의 임지현 교수 수업 교재도 검사가 압수한 이적표현물로 압수되어 논란이 되었습니다.
  • 死海文書 2012/12/18 11:31 # 답글

    역사가 진보한다는 믿음 자체를 빨갱이 역사관으로 볼아붙일 수 있는 당시의 검사가 대단하군요....
  • 파리13구 2012/12/18 11:46 #

    덜덜덜...
  • 措大 2012/12/18 19:01 # 답글

    부림 사건 때도 같은 일이 있었다는 걸 읽은 적이 있는데...설마하고 찾아보니 -- 92년 기사에 걸리는군요. 군 지정 불온간행물 도서목록에 올라와 있네요.

    카테고리가 무려 "폭력 정당화 도서"
  • 파리13구 2012/12/19 05:16 #

    헐...
  • Rock Bogard 2012/12/18 19:42 # 답글

    90년대 중반까지는 이런 일이 있었던 거네요. 학기 초마다 역사 교과서에서 보던 사람의 책이 불온서적이였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네요.
  • 파리13구 2012/12/19 05:17 #

    한국의 민주화 역사는 여전히 짧습니다.
  • 찬별 2012/12/19 12:55 # 답글

    80년대 중반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90년대 중반에 있었던 일이라니...
  • 파리13구 2012/12/20 09:57 #

    당혹스러운 과거입니다...
  • 믹갱 2014/01/07 13:36 # 삭제 답글

    영화 변호인에서 나오는 책의 이름을 보고 검색하다가 여기에 이르렀네요.
    역사를 좋아하는 어른으로서 중,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제일 첫 장에 나오는 설명이 바로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입니다. 교과서 배웠던 책이 80년대엔 빨갱이 책으로 간주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는 데, 지금 블로그 주인이 쓰신 글을 보니 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러했군요. ㄱ- ㄷㄷㄷ
  • 파리13구 2014/01/07 14:09 #

    네, 90년대까지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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