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란트 재무장,스탈린 그리고 대숙청의 관계는?" 유럽외교사

"레닌과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와 서양"



[소련]
[스탈린][스탈린주의]
[라인란트 재무장]
[대숙청]


"라인란트 재무장,스탈린 그리고 대숙청의 관계는?"


조지 캐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936년 3월 7일의 독일군의 라인란트 점령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독일이 자발적으로 체결한 1925년의 로카르노 조약에 대한 위반이었다.


3월 7일은 프랑스-소련 상호원조 조약이 프랑스 하원에서 비준된 직후이며, 몇 일뒤에 상원 비준이 예정되어 있었고, 히틀러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 조약이 로카르노 조약에 위반된다고 주장하면서, 대담하게 라인란트를 재무장했던 것이다. 이같은 독일의 도발에 프랑스는 무력으로 대응하려 했다. 프랑스는 당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반대로 무력 대응은 좌절되었다.


스탈린의 관점에서,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은 큰 충격이었다. 이것은 리트비노프 소련 외무장관의 친서방노선이 서양의 히틀러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도발이 프랑스-소련 상호원조 조약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했다.


스탈린을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2년동안의 지지부진한 노력의 결과로 프랑스-소련 상호원조 조약이 겨우 비준될 찰라, 히틀러는 대담하게 라인란트를 재무장했고, 프랑스의 바로 코 앞의 땅에서, 아무런 처벌없이 도발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스탈린이 얻은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법적인 서류상의 약속이 아무런 구속력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담하고 난폭한 행동이 매우 성공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정도의 현실주의자였다. 그리고 라인란트 재무장은 서양에 맞선 히틀러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킨 성공 사례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히틀러가 동쪽인 소련국경 쪽으로 유사한 도발을 해온다면, 서양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스탈린의 관심사가 되었다. 스탈린의 의심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와 영국이 자신의 앞마당에서의 도발에 대해서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대응하는데, 하물며 소련쪽 국경으로의 도발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응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매우 예리한 분석이었다.


라인란트 재무장 이후,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무력대결이냐 아니면 히틀러와 타협이냐가 단지 시간문제임을 간파하게 되었다. 그는 물론 히틀러 같은 공격적인 계획을 가진 인물을 상대로 영원한 평화를 거래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타협을 통해, 책략 혹은 군사적 대비를 위한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그가 히틀러의 침략 방향을 소련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도 역시 가능했다.


하지만, 양자 중 어떤 경우이든, 다음과 같은 문제가 여전히 남았다. 어떤 경우이든, 국내에서의 매서운 비판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불가피해 보였다. 예컨대, 가령 히틀러가 공격해 온다면,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면전에 돌입할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스탈린이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대해서 초반에 무관심했다는 실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것이었다. 왜 처음부터 히틀러를 견제하지 않았냐는 비난이 제기될 것이었다. 반대로, 만약 스탈린이 히틀러와 거래를 한다면, 그는 반-파시즘 대의를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었고, 유럽 공산주의의 적인 히틀러와 손을 잡았다는 비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스탈린의 해법이란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는지와 무관하게, 소련 국내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하는 것이고, 자신에 대한 반대파를 사전에 미리 정리해야 될 필요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즉 독일문제로 스탈린 본인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기 전에, 비난의 싹을 잘라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스탈린의 계산 만으로 소련의 대숙청 1934-1938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같은 계산이 소련 대숙청의 복잡한 동기들 중 하나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