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란트 재무장시 프랑스의 예방전쟁이 좌절된 이유는?" 유럽외교사

"언제 히틀러에 대한 예방전쟁을 벌여야 했을까?"

<라인강 서안에 위치한 라인란트>

[제2차세계대전]
[나치외교]
[라인란트 재점령]
[유화정책][예방전쟁]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과 프랑스의 대응"


1936년 3월 7일의 독일군의 라인란트 점령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독일이 자발적으로 체결한 1925년의 로카르노 조약에 대한 위반이었다.


알려진 바와 달리, 프랑스 정부는 영국보다 더 직접적인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라인란트 위기에서 독일에 대해서 강경대응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1936년 3월 3일, 베를린주재 프랑스대사 프랑수아 퐁세가 플랑댕 외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 따르면, 프랑스 지도자들은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과 라인란트 요새화로 히틀러의 서부전선이 안전하게 될 것이라 경계했고, 동유럽의 프랑스 동맹국에 대한 독일의 침공시에 프랑스의 지원을 어렵게 만든다고 우려했다.


1936년,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은 독일이 2년안에 전쟁을 도발할 것이라 믿었고, 만약 독일이 라인란트를 재무장하고,요새화한다면, 독일에게 더 유리한 전쟁이 될 것이라 믿었다. 라인란트로의 진군이 임박했다는 첩보가 프랑스측에 알려졌을때, 프랑스는 단호하게 대응하기를 원했고, 효율적인 응징책을 고민했다. 프랑스 외무장관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Pierre-Etienne Flandin 과 프랑스 총리 알베르 사로 Albert Sarraut는 프랑스 단독으로 혹은 영국과 협력해서, 명확한 강경대응을 하기를 원했다. 라인란트로부터의 독일군 철수를 요구할 예정이었고, 국제연맹에서의 규탄 그리고 국제연맹과 로카르노 조약 당사국들에게 프랑스의 군사 조치에 대한 지원을 요청할 예정이었다. 플랑댕은 이같은 독일에 대한 압박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고, 독일의 철수를 유도할 것이라 희망했지만, 만약 독일이 굴복하지 않을 경우, 예방전쟁을 일으킬 결의도 가지고 있었다. 플랑댕은 이같은 단호한 조치가 히틀러 체제의 붕괴로 귀결될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 히틀러는 이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약 당시에 프랑스가 라인란트로 진격해왔다면, 우리는 철군해야만 했을 것이다. “[i]f France had marched into the Rhineland . . . we would have had to withdraw with our tails between our legs.”(Paul Schmidt, Hitler’s Interpreter (London: Macmillan, 1951))


하지만 프랑스 군부가 독일과의 대결에 미온적이었다고 한다. 프랑스군 참모총장 모리스 가믈랭 Maurice Gamelin 은 플랑댕에게 프랑스군은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지만, 1930년대 군예산의 구조적인 삭감 때문에, 그리고 마지노 선이 상징하는 프랑스의 방어전략 때문에, 프랑스군은 자르 점령을 제외하고는, 일방적인 군사 공격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국방예산이 17% 삭감되었다!) 2월 19일의 프랑스 참모본부 회의에서 가믈랭은 프랑스 단독으로 독일을 라인란트에서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독일과의 양자 대결에서, 독일이 군사적 잠재력,인구,산업 능력,군수 생산 분야에서 확실한 우위를 가지게 될 것이었다. 가믈랭은 독일군이 이미 프랑스군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고 믿었고, 이는 가믈랭만의 믿음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공군장관 마르셀 데아 Marcel D´eat 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우리는 예비군과 엄청난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고, 물자와 훈련 분야에서 우리 보다 월등한 공군과 육군을 상대하게 될 것이 매우 확실하다."


이같은 암울한 군사적 전망에 직면해서, 플랑댕은 영불합동 개입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1924년 루르 점령 위기 이후, 프랑스 군부에게 영국의 개입은 대독 군사행동을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2월 27일 플랑댕이 "프랑스는 단독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 가입국의 동의 없이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론 내린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하지만 벨기에는 너무 작은 나라였고, 군사적으로 무의미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파리가 이탈리아에 대한 석유 제재조치를 실시중이었기 때문에, 무솔리니가 프랑스를 지원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의 동유럽 동맹국들,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는 프랑스를 지원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따라서 플랑댕은 결국 영국을 설득할 수 밖에 없었지만, 영국의 지원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 곧 명확해지게 되었다. 이제 프랑스에게 남은 방안이란 국제연맹 차원에서의 소극적인 외교적 대응밖에 없었다.

출처- NORRIN M. RIPSMAN and JACK S. LEVY, The Preventive War that Never Happened: Britain, France, and the Rise of Germany in the 1930s




덧글

  • 셔먼 2012/10/27 03:12 # 답글

    하필이면 국방예산 삭감으로 독일에 대응할 만한 귀중한 전력을 잃게 되었군요.
  • 파리13구 2012/10/27 03:46 #

    당시가 대공황의 시대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 零丁洋 2012/10/27 08:34 # 답글

    정상국가에서 최후의 수단을 의지하기는 쉽지 않죠. 그래서 파국을 예견하고도 항상 때 늦은 경우가 많죠. 한마디로 실기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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