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중국 갈등에 대해서...
중앙일보의 김영희는 같은 제목의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은 비스마르크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 오스트리아와 함께 덴마크와 전쟁을 하여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분할 점령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186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담판하여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밀약을 받아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패배할 것을 확신하고 전쟁을 부추겼다. 1866년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3주 만에 홀슈타인을 점령하고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최후의 일격을 안겼다. 철도로 병력을 신속하게 이동한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의 획기적인 전략에 오스트리아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몰트케와 휘하 장군들은 빈을 점령하자고 주장했다. 비스마르크가 반대했다. 그는 후일을 위해서 오스트리아에 더 이상의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비스마르크는 이미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러시아의 패전을 바라고 중립을 지킨 나폴레옹 3세는 중립의 대가로 라인강 좌안의 영토를 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당연히 거절했다. 빈 체제는 영웅 나폴레옹이 유럽 대륙에 전파한 프랑스 혁명의 효과를 차단·무력화하는 보수체제였다. 그래서 영웅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에게 빈 체제는 눈엣가시였다.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빈 체제에 최종적인 사망선고를 내린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통일된 독일이 등장하여 빈 체제를 대신하고 대륙의 강자가 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비스마르크는 남부독일 국가들과 비밀동맹을 맺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로부터는 중립의 약속을 받아냈다. 몰트케의 주장대로 1866년 전쟁 때 프러시아가 빈을 점령했더라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전쟁을 하면서 배후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는 온다. 1868년 공위(空位)가 된 스페인 국왕 자리를 놓고 다툼이 생긴 것이 도화선이 되어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승리는 준비한 자의 몫으로 돌아갔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간섭과 영향력을 차례로 제거하고 1871년 4개 왕국, 18개 공국, 3개 자유시, 2개 제국령을 가진 역사적인 통일국가를 실현했다.
덧글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도서관에 있지 않을까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비스마르크입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저의 정치성향은 좌파쪽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