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무솔리니가 히틀러 견제에 나선 이유는?" 유럽외교사


<1935년 4월 14일의 스트레자 회담 직후 - 사진속의 인물은 좌에서 우로
피에르 라발 -프랑스 외무장관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통
램지 맥도널드- 영국 총라
플랑댕 Pierre Étienne Flandin - 프랑스 총리>

[제2차세계대전]
[전간기]
[파시즘][무솔리니]


"무솔리니가 히틀러 견제에 나선 이유는?"
- 1935년의 스트레자 전선 결성 배경은?


영문 위키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스트레자 전선
Stresa Front


스트레자 전선은 이탈리아의 마지오레 호수 기슭에 있는 마을인 스트레자에서의 합의로, 프랑스 외무장관 피에르 라발, 영국 총리 램지 맥도널드, 이탈리아 총통 베니토 무솔리니가 1935년 4월 14일에 체결했다. 공식적으로는 스트레자 회담의 최종선언이라 불리며, 그 목표는 로카르노 조약의 재확인, 오스트리아의 독립이 3국 공통의 정책으로 유지될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3국은 또한 이후에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수정하려는 시도에 나설 경우, 이에 저항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중요했던 것은, 두체에 대한 파시스트 선전, 즉 무솔리니가 경험많은 정치인이며, 평화의 보증자라는 것을 선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무솔리니가 1934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좌절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1934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합병을 시도하자, 이는 무솔리니의 거센 항의를 받았고, 그는 히틀러에게 만약 그가 오스트리아에 한발자국만 디디면, 이탈리아가 독일에 대해서 군사행동을 취할 것이라 경고했었다.


배경


스트레자 전선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1935년 3월에 독일 공군을 재건하고, 독일 육군을 36개 사단의 75만명으로 증강할 것이라 선언하자, 이에 대한 외교적 대응으로 나왔다. 히틀러의 독일 재군비 결정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정면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군을 96,000명 수준으로 유지하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스트레자 전선의 결성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아비시니아 위기 the Abyssinian crisis 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1935년 10월, 무솔리니가 아비시니아 침공을 단행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고,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 문제에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했다. 국제연맹이 대 이탈리아 경제재제에 동의하자, 무솔리니의 대외정책은 영국과 프랑스 진영에서 이탈, 히틀러 독일쪽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결과


스트레자 전선은 모호한 조항과 그 목표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전선은 독일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회피했고, 이는 영국이 이중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고, 히틀러를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 무솔리니는 강경대응을 주장했지만, 영국은 독일과의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유연한 대응을 주장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의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 추측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전선의 모호한 조항 때문에, 히틀러는 영국의 의도를 추측할 수 있었다. 영국은 스트레자 전선이 독일 견제를 위해서 가지는 장점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영국-독일 해군협정 the Anglo-German Naval Agreement 의 체결로 스트레자 전선은 실패하고 말았다.


전선 실패의 또다른 이유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가 독일 침공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재군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3국의 독일에 대한 전면 침공 뿐이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이같은 방법을 채택하기를 꺼렸고, 이는 영국 국민의 강력한 반전 여론 때문이었다.


전선은 성공하지 못했다. 2달 후에, 영국은 영독해군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독일은 영국해군의 35% 수준으로 해군력 증강,그리고 잠수함 건조에 대한 영국의 동의를 얻어냈다. 영독해군협정과 관련, 영국은 프랑스,이탈리아와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고, 이렇게 전선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는 스트레자 전선을 결성한 국가들이 동상이몽이었음을 보여준다. 전선은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침공에 따라, 완전히 붕괴했다.


무솔리니는 오랫동안 아비시니아에 대한 야심을 가져왔다. 그는 영국이 자신과의 사전 논의없이 영독해군협정을 체결하자 분노했다. 스트레자 전선 결성에 따라, 무솔리니는 침공을 망설이고 있었고, 아비시니아는 프랑스령,영국령 소말리랜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동맹국들을 화나게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독해군협정의 체결로, 그는 영국이 자신을 배신했고, 이것이 아비시니아 침공에 대한 그의 모든 주저를 없애버렸다. 그는 또한 영국의 행동이 스트레자 전선에서 합의된 조건의 종말에 다름아니다고 믿었다. 


1936년 1월 6일, 무솔리니는 로마 주재 독일대사 울리히 폰 하셀 Ulrich von Hassell 에게, 그는 만약 독립이 유지된다면,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위성 국가로 만드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2월 22일,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점령을 위한 걸림돌을 하나를 다음과 같이 제거해 주었다. 즉 이탈리아는 로카르노 조약의 의무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독일이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 재무장에 나선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덧글

  • 행인1 2012/10/08 23:06 # 답글

    대체 영국은 뭘 바랬던건지...;;;
  • 파리13구 2012/10/09 11:07 #

    당시 영어사전에는 일관성이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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