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코 외무부 앞의 에드바르트 베네시 동상>
19세기 중반 체코의 민족주의자 프랜티셰크 팔라츠키는 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 Austroslavism 를 주장한 바 있다.
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는 독일어 사용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유럽 슬라브 군소 민족들의 평화적 유대를 제안했다.
그렇다면, 팔라츠키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이 아닌, 제국의 틀 내부에서의 체코의 자치를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1918년 독립 이후의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를 보면,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 구상의 선견지명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신생 독립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과 소련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지정학적 약점을 안고 탄생했고, 결국 이같은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 뮌헨협정 이후 독일 히틀러에게 합병당했고,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는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가가 되었다.
팔라츠키는 슬라브 민족들이 민족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이탈해 독립국가를 형성할 경우 과연 그러한 국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 강한 의구심도 제기했다. 팔라츠키는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이 주어진 체제를 인정하고 거기서 그들의 민족성을 보존하면서 권익 향상을 점차적으로 도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제시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vism)의 핵심적 내용이라 할 수있다.
19세기 팔라츠키의 체코의 지정학적 운명에 대한 고민은 20세기 중반 체코슬로바키의 베네시의 삶에서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1930년대 베네시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외교,안보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우선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이후에는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영문위키에 따르면, 베네시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
[제2차세계대전]
[외교사]
[체코슬로바키아][뮌헨협정]
에드바르트 베네시
Edvard Beneš
(1884년 5월 28일-1948년 9월 3일)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외무장관, 제2대 대통령이었다. 그는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베네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소련에 대해 매우 순종적이었고, 이것이 그의 명성에 누가 되었다.
유년시절
에드바르크 베네시는 프라하 서쪽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작은 마을인 코즈라니 Kožlany 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프라하의 비노하르디 Vinohrady 지구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1896년부터 1904년까지 문법학교에 다녔다. 프라하의 카를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그는 파리로 유학, 소로본대학과 정치과학 자유학교 École Libre des Sciences Politiques 에서 공부했다. 그는 프랑스 디종에서 첫 학위를 취득했고, 1908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땄다. 그리고 그는 프라하 상업 전문학교에서 3년동안 배웠고, 그는 카를 대학에서 사회학 강사가 되었다.
첫번째 망명
제1차세계대전 동안, 베네시는 해외 체고슬라비키아 독립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마피아"라 불리는 반-오스트리아 지하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했다. 1915년 9월, 그는 파리로 망명, 그곳에서 체로슬로바키아 독립 운동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승인을 얻기위한 외교적 노력을 전개했고, 1916-1918년 파리의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 서기장이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임시정부 내무장관과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1918년 5월, 베네시,마사리크,스테파니크는 프랑스의 서부전선에서 싸우기 위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결성했다고 보고했고, 150만명으로 알려진 미국의 체코계 이민자 중에서 전선에 갈 수 있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을 모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1918-1935년, 베네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이자 최장수 외무장관이 되었고, 1920-1925년 그리고 1929-1935년 그는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베르사유조약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대표했다. 1923-1927년 그는 국제연맹 이사국 a member of the League of Nations Council 체코슬로바키아를 대표했다. 그는 국제 회의에서의 저명하고 영향력있는 인사였고, 1922년의 제노바 회담, 1925년의 로카르노 회담, 1930년의 헤이그 회담, 1932년 로잔느 회담에 참석했다.
베네시는 체코슬로바키아 민족 사회주의당의 당원 the Czechoslovak National Socialist Party 이었고, 강력한 체코슬로바키아주의자였고, 그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다른 민족이라 간주하지 않았다.
1935년, 베네시가 2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38년 주데텐란트에 대한 나치 독일의 요구를 거부했다. 1938년 10월, 주데텐란트 위기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 비화되었고, 이 위기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히틀러의 독일에게 양보해서 뮌헨 협정을 체결했고, 주데텐란트에 대한 독일의 즉각적인 군사 점령이 용인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참여가 배제된 상태에서 뮌헨 협상이 관철되자, 베네시는 1938년 10월 5일에 독일의 압력에 의해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에밀 하하 Emil Hácha 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1939년 3월, 하하 정권은 나머지 체코 영토에 대한 독일의 점령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슬로바키아는 당시 독립을 선언했다.
<두번째 망명>
1938년 10월 22일, 베네시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1940년 그는 런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를 구성, 슬라메크를 총리로,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다. 1941년, 베네시와 모라베크가 하인리히 하이드리히 암살을 위한 유인원 작전 Operation Anthropoid 을 계획했다. 1942년의 하이드리히 암살로 독일측의 야만적인 보복이 있었고, 수천명의 체코인이 집단학살 당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시는 스탈린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가 폴란드 보다는 소련과 동맹해서 더 얻을 것이 많다고 보았다. 그는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계획 the Polish-Czechoslovakian confederation 에 반대했고, 1943년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 협상을 체결했다.
<두번째 대통령 임기>
제2차세계대전 말의 프라하 봉기 이후, 베네시는 귀국, 이전 대통령 임기를 계속해 나갔다. 1945년 10월 28일 국회가 그를 공화국 대통령으로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헌법에 의거, "신임 대통령 선출 이전까지, 전임 대통령이 대통령 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른 것이었다. 1946년 6월 19일, 베네시는 대통령으로 두번째로 다시 공식적으로 선출되었다.
베네시의 대통령 명령에 따라, 독일과 헝가리계 소수민족이 추방되었고, 대다수의 독일인이 서양,동독,오스트리아로 추방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시 명령은 현재까지도 유효하고, 논란의 대상이며, 추방당한 사람들이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체코 정부는 베네시 명령이 현재 더이상 적용되지 않고 있고, 과거에 유럽 위원회와 유럽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베네시는 연립정권을 통치했고, 1947년부터 공산주의자 지도자 클레멘트 고트발트 Klement Gottwald 가 총리직을 수행했다. 1948년 2월 25일, 고트발트의 압력하에 베네시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부를 구성했고, 이 정부가 공산주의 쿠데타를 법적으로 승인했다.
쿠데타 직후, 공산당이 지배하는 의회에서 5월 9일 헌법이 반포되었다. 이 헌법은 매우 공산주의적이었고, 소련 헌법에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베네시는 이를 서명하기 거부했다. 그는 1948년 6월 7일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고, 고트발트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