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에 상륙해야만 했을까?" (끝) 레지스탕스

"북아프리카에 상륙해야만 했을까?" (5)

<지중해에서의 곤경>

1943년 5월, 성과는 최소한 기분좋은 것이 아니었다. 6달 이상이 걸려서, 추축국이 아프리카에서 쫓겨났고, 연합군이 지중해를 장악하게 되었다. 영미 연합군의 느린 진격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급하게 증원군을 급파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15만명에서 24만명을 포로를 만들 수 있었다. 연합국이 이탈리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을때, 이같은 손실은 추축국의 큰 손해였다. 연합국은 1943년 7월 10일 시칠리아 침공을 개시했다 (허스키 작전)


한편 북아프리카 프랑스 제국이 연합국측에 가담하면서, 연합국은 유럽 공격을 위한 보급기지를 가지게 되었고, 영미군은 식민지의 자원, 특히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징발된 병력으로 프랑스 원정군이 결성되었고, 이들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게 되고, 1944년 8월 15일 프랑스의 프로방스로 상륙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승리는 횃불작전이 드러낸 불안한 약점들을 감추게 할 수 없었다.


북아프리카 전투는 명백한 약점들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우선, 영미군간의 협력은 까다로운 것이었고, 이는 양국간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다. 영국인은 미국인의 아마추어리즘을 경멸했고, 마치 독일인이 이탈리아인을 바라보듯이 했다. 반대로 미국인은 자신의 옛 제국 주인들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육군과 해군간의 협력도 어려웠고, 패튼 장군은 해병들을 "방울뱀 무리"들로 간주했다. 뿐만아니라 영국군 장군들, 특히 앨런 브룩 참모총장은 장군들 중 절반은 무능하다고 평가했고, 대담하게 전진하기 보다는 군대를 모이기를 좋아한다고 비판했다. 이것 때문에 연합군은 기습 전술이라는 이점을 누리지 못했고, 독일에게 공격 혹은 방어 전열을 정비할 휴식을 제공했다. 연합군은 독일 롬멜식의 대담함을 결여하고 있었고, 반대로 독일은 대담함 덕분에 힘에서 밀리는 가운데에서도 승리하기도 했다.  


연합군의 보급도 문제였다. 진격이 계속되면서 알제리에 있는 후방 기지로부터의 보급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리고 때로 군의 장비 보급이 열악했다. 미군은 살상력이 낮은 연습용 탄약을 들고 전선으로 갔다. 미제 전차는 너무 불이 잘붙어, 병사들은 그것을 <론손 전차>라 불렀다. 론손은 불이 잘붙는 만능 라이터 이름이었다. 공중 엄호도 불충분해서, 미군 조종사들의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주 제공권을 장악한 것은 독일공군이었다. "우리 공군은 어디있지? 왜 우리는 적기만을 보게되는 거야?"라고 병사들이 불평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좋아졌다. 하지만 진전은 더디기만 했다.


프랑스의 변덕도 문제였다. 다들랑 제독의 이중성 때문에 연합군의 튀니지로의 진격을 방해받았고, 반면 독일은 병력과 물자 보급을 위해 튀니지의 항만과 비행장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작전의 전략적 가치도 특히 몽상적이었다. 왜냐하면 횃불작전으로 연합군은 북서유럽을 희생해서 지중해에서 싸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처칠은 영미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결정은 여러가지 면에서 재앙인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 독일은 이탈리아에서 싸우기 위해서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일부 철수시켜야만 했다. 1943년 4월과 12월, 제3제국은 러시아로부터 27개 사단을 빼오는 사치를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1944년 봄, 29개의 연합군 사단이 22-23개의 독일군 사단과 싸웠다. 이런 면에서 보면, 어느 편이 어느 편을 함정에 빠트렸는지 질문해봐야 한다. 또한 이탈리아는 밑빠진 독이었고, 많은 자원을 소진시켰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준비도 위협했다. 1943년 12월 31일, 768274명의 미군이 영국에 주둔하고 있었고, 참모본부는 노르망디 상륙을 위해 1,026,000명을 파병할 것이라 예상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597 658명이 싸우고 있었고, 이것은 이전에 예상한 432700명 보다 더 많은 것이었다.


결국 횃불작전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연합군을 지중해라는 난관의 함정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이 작전의 승리로 얻게될 이익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었다. 이 첫경험을 통해서 얻은 교훈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략 수립에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처칠의 지적처럼, 전쟁을 사막의 모래 혹은 로마의 언덕에서 승리할 수는 없었다. 루스벨트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 1943년말의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스탈린과 힘을 합쳐, 처칠이 1944년 5월로 예정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제2차세계대전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이렇게 영국 총리의 고집때문에, 이미 충분히 두꺼운 상태의 세계대전사라는 역사책에 몇장이 무의미하게 추가되었던 것이었다.  




덧글

  • 토나이투 2012/09/01 14:23 # 답글

    항상 좋은글 잘읽고있습니다

    쓰시는 글들이 마치 1차 사료같은 느낌이 들어서 왠지 모르게 더 집중이 됩니다
    정말 부러운 필력입니다
  • 파리13구 2012/09/01 15:02 #

    감사합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 일화 2012/09/01 23:25 # 답글

    시리즈를 다 읽고 말씀드리려고 했던 것이라 이제 댓글을 다는데, 보통 2차대전사에서 북아프리카 작전은 저런 문제점을 사전에 점검하여 노르망디상륙작전이라는 본게임에서의 실수를 줄여주는 연습게임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42년에 바로 서유럽에 상륙하는 것은 당시 영미의 상황으로서는 무리였고, 스탈린이 제2전선을 재촉하고 있었으며, 영미로서도 미리 대규모 상륙작전을 해볼 필요가 있었던 이상, 북아프리카 상륙은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것이죠. 이번 글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탈리아 상륙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느냐는 다소 의문입니다만, 이 또한 독일의 제1동맹국을 전열에서 이탈시켰다는 점에서 정치외교적으로는 괜찮은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고, 군사적으로도 (주로 히틀러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지만) 동부전선에서 기갑전력을 차출시킨 덕분에 쿠르스크 전역에서 소련군이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결과적으로는 충분한 성과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 파리13구 2012/09/03 12:33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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