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에 상륙해야만 했을까?" (4)
<아프리카에서 벼랑끝에 몰린 주축국>
연합군의 서쪽에서의 진격이 정체되자, 곤경에 빠진 아이젠하워는 주된 공격 방향을 바꿨다. 동쪽에서, 몽고메리의 영국군이 리비아에서 공세에 돌입했다. 1943년 1월 23일에 트리폴리를 점령한 영국은 2월 16일에 튀니지 국경을 넘었다. 아이젠하워는 스팩스 Sfax로 진격하는 영국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고, 이는 롬멜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롬멜은 통찰력있게 자신의 군대에 대한 위험을 감지했다. 그는 영국이 밀려오기 전에, 미군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2월19일, 독일군은 카세린 언덕에 집결했다. 하지만 병력과 물자 부족으로, 독일군은 곧 포위당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롬멜은 당시에 아팠고, 휴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3월 9일 북아프리카를 떠났고, 부대 지휘를 폰 아르님 von Arnim 장군에게 넘겼다.
3월과 4월에, 영국군과 미군이 공세를 재개했다. 몽고메리가 튀니지의 마레쓰 방어선을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독일-이탈리아군은 프랑스가 리비아로부터의 이탈리아군 침공을 막기위해 만든, 이 보잘것 없는 요새 뒤에 숨어서 적을 맞았다.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패튼 장군의 미군이 동쪽에서 공세를 취했다 ; 미군 제2군의 공격으로 통신망 단절을 우려한 독일군의 일부가 이를 막기위해 투입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몽고메리의 진격을 쉽게 만들었다.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독일-이탈리아군은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우선 힘의 균형이 주축국에 불리했다. 4월말, 독일군은 병력 6만에, 전차 100대를 보유했던 반면, 연합군은 미군의 병력 충원 덕분에, 30만명으로 증원되었다.
보급도 차이가 있었다. 롬멜이 매달 14만톤의 보급이 필요하다고 계산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실제로 수령한 것은 1943년 3월 29000톤 뿐이었고, 반면 미군은 같은 시기 40만톤을 보급받았다. 석유와 탄약이 고갈된, 독일군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연합군이 독일군의 고통을 단축시켰다. 결국 합류한, 리비아에서 온 영국군과 미국이 5월 6일 최공 공세에 돌입했다. 앤더슨 장군의 영국군 제1군단은 7일에 튀니스에 진입했고, 미군 2군단은 같은 날에 비제르테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5월 13일, 독일의 폰 아르님과 이탈리아의 메스 장군이 항복을 선언했다. 이렇게 지중해 남부 연안이 유니온 잭과 성조기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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