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에 상륙해야만 했을까?" (2)
[비시의 저항]
실제로, 비시 군대는 포격으로 해방자들을 환영했다.
알제리에서, 연합군은 낡은 군함에 타고 있는 병사들을 상륙시켜서 오랑과 알제 항구를 점령하기를 원했다. 오랑에서, 하트랜드호와 월니호가 곧바로 피격되어, 군당국은 항만 시설물 건설을 위한 자재들을 바다로 던져야했다. 이 군함을 수리하는데 2달이 걸렸다.
라빌블랑슈에서, 구축함 브룩크호와 말컴호가 퇴각해야만 했고, 비시 군대는 방금 상륙한 연합군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해변에서, 프랑스의 반격은 대신 덜 열성적이었다. 놀랍게도, 오란의 13개 포병대가 새벽녘에 불을 뿜었지만, 감격적이게도 정전 명령이 내려지면서, 그들의 저항은 무위로 돌아갔다. 오랑 해변에서, 14대의 르노 전차가 반격해왔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전투 도중 5대가 철수해야만 했다.
알제에서, 상륙한 33000명의 병사들이 입은 대부분의 피해는 아군의 실수 때문이었다 많은 바지선들이 과잉적재로 침몰했다. 다른 바지선은 수문이 너무 일찍 열리는 바람에 침몰했다. 6척의 상륙정이 해군 분견대의 포격에 침몰했다.
프랑스측의 반격의 강도는 연합군을 위한 음모가들의 협력 덕분에 또한 감소되었다. 밤 동안, 알제의 실권을 장악한 친연합군 봉기세력이 지휘계통을 마비시켰고, 해변의 장교들의 연합군 해방자들을 안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특히 양군사이의 힘의 차이가 결정적이었다. 프랑스군에 대해서 5:1로 수가 많았던 연합군은 다를랑 제독과 주앵 장군의 주저에도 불구하고, 친-비시 군대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시디-페뤼쉬 요새는 첫날에 항복했고, 알제에 주둔한 7000명의 무장이 허술한 부대는 3만명의 연합군 병사의 공격에 직면해서 허무하게 항복했다. 따라서 11월 8일 18시 45분에 휴전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이는 알제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전투는 이후 3일동안 오랑에서 계속되었다. 포위된 오랑은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의 늦은 명령 때문에 항복이 늦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 제1사단, 전설적인 빅레드원 Big Red One 에서 300명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
모로코 해안의 상황은 이와는 달랐다. 함대는 우선 사나운 바다에 직면해야 했다. 왜냐하면 파도가 1,5미터만 되도 우려할만한 상황으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당시의 파도는 5미터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3곳으로의 상륙이 예정되어 있었다. 주요 목표 지점은 페달라 Fedala 였고, 여기로부터 카사블랑카 항의 공격이 개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떤 선박도 정확한 지점에 도착하지 못했고, 몇몇 선박은 원래 지점에서 6마일 이상 떨어진 지점에 도착했다. 몇몇 바지선에 암초에 부딪히면서 상황이 더욱 혼란스러웠다.
프랑스는 철갑선 장-바르호를 투입했고, 전투에 잠수함을 동원했다. 미국은 이에 난폭하게 대응했다. 미국은 장-버르호를 침몰시키고, 전투기를 동원 16척의 함정을 침몰 혹은 파손시켰다. 하지만 11월 9일 악천후가 파델라를 지배했다. 378척의 바지선과 상륙정의 절반이 침몰 혹은 해안으로 좌초했고, 이것으로 패튼 장군의 부대가 혼란에 빠졌다. 해안에 대포가 도착했지만, 포탄이 없었다. 차량의 부족으로 많은 부상병들이 해안에 방치되었다. 부대는 예정된 6킬로미터 떨어진 곳이 아니라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상륙, 그만큼 더 많이 행군해야 했다. 미국은 아무튼 11월 8일 밤에 사피를 장악, 이 성공으로 마라케슈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의 개입 가능서이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메디아 Mehdia 의 상황이 문제였다. 메디아 부근에는 지역에서 유일한 비행장이 있는 포르트-로티 Port-Lyautey 가 있었고, 이곳을 장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악천후로 물과 탄약을 보급하는데 장애를 겪은 트루스코트 Truscott 장군의 병사의 절반이 예정된 54대의 전차가 아니라, 7대의 전차만을 가지고 싸웠다. 아무튼 프랑스군이 11월 11일, 전투를 중지했고, 이 덕분에 패튼 장군의 분노가 불타는 일이 없게 되었다. 조바심에 화가난 패튼은 만약 카사블랑카가 저항을 계속한다면, 이 도시를 밀어버릴 것이라 경고했던 것이었다.
상륙작전 결과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평가가 엇갈린다. 연합군은 횃불 작전을 애초에 상대적으로 잘못 구상했다. 군대를 9개의 지점으로 분리시키면서, 힘의 집중이라는 이익을 얻지못했다. 훈련이 덜 된 군대가 그들의 경험 미숙을 드러냈다. 악천후로 보급이 어려웠고, 이것이 군대에 혼란을 주었다. 11월 10일 전군이 모로코에 상륙했을 때, 보급품의 3/4이 선박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애국적 관점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상륙의 성공은 페탱 군대가 지나치게 약했던 덕분이었다. 그들의 장비는 노후되었고, 사기도 낮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만약 영미 연합군이 독일군을 상대했다면, 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비시프랑스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와 다를랑 제독의 양다리걸치기 덕분이기도 했다. 전투에서 연합군 병사 700명의 희생당했고, 프랑스쪽 사상자도 이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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