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페탱의 비시프랑스를 버리지 않은 이유는?"(2) 레지스탕스

"미국이 페탱의 비시프랑스를 버리지 않은 이유는?"(1)

1940년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국무장관 코덜 헐은 자신의 비시 정책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비시 주재 신임 미국 대사에 윌리엄 리히 제독을 임명했다. 그는 정치적 경험에 한계가 있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이는 그의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상쇄되었다.


대통령이 대사에게 요구한 것은 페탱 정권이 미국이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상대인지 탐색해보라는 것이 아니었다. 대사가 지시받은 것은 페탱 원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프랑스 해군 고위 장성들과도 접촉, 프랑스의 독일과의 협력 혹은 프랑스 함대를 독일에 넘겨주는 것이 프랑스의 이익에 반한다는 점을 설득시키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프랑스에 대한 선의가 끝장난다는 것을 주지시키라는 것이 대통령의 요구사항이었다.


리히 대사가 비시가 머문 18개월 동안, 그는 대통령의 희망이 달성되도록 노력했다. 그의 임무가 단순했던 것은 미국의 설득 없이도 프랑스인들이 이미 함대의 보존이 프랑스의 이익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 리히가 프랑스를 설득시키기 보다는, 프랑스가 리히를 설득, 대사가 비시 정권의 틀 내부에서 독일에 대한 저항이 있다는 점을 믿게 만들었다. 이것이 어느정도는 사실이었지만, 리히는 그 저항의 정도,본질,가치를 평가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특히 이같은 비시의 저항이 드골의 비합법 저항 운동에 비해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지를 비교해서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이 없었다. 따라서 그가 확신한 것이란, 페탱 행정부 내에 중요한 저항의 씨앗이 존재하고, 따라서 런던에서 드골이 만든 비합법 레지스탕스 운동은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리히 대사는 1942년 4월 미국으로 귀국, 실무에서 은퇴해서, 그의 대 프랑스관이 불미관계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1942년, 리히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군사보좌관,핵심 참모가 되었고, 백악관내의 이너써클의 일원이 되었고, 미국 합동참모본부 회의와 영미 합동 참모본부 회의에서 대통령의 개인적 대리인이 되었다.


리히는 그의 기존견해를 수정하지 않았다. 1943년과 1944년에도 그는 프랑스 상황이 1941년 그가 체류하던 시절과 동일하다고 확신했다. 이같은 정보 오판으로, 그는 드골이 프랑스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고 계속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는 전국적 규모의 국내 레지스탕스 운동이 조직되어, 해외의 드골의 자유 프랑스 운동과의 연계가 이미 확립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리히의 이같은 친비시-반드골 시각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덧글

  • 셔먼 2012/08/30 16:13 # 답글

    비록 외부로 표출된 적은 없었지만 비시 정부 내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저항의 조짐이 보였군요.
  • 파리13구 2012/08/30 16:24 #

    네, 조짐은 있었습니다.
  • 행인1 2012/08/30 22:29 # 답글

    웨이강 장군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었죠. 하지만 이분도 나중에 수용소 신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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