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에 상륙해야만 했을까?" (1) 레지스탕스

[제2차세계대전]횃불작전 70주년

<횃불작전 - 작전반경 1400킬로미터>

[제2차세계대전]
[제2전선]
[횃불작전]


"북아프리카에 상륙해야만 했을까?"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이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주축국 축출을 위한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이 전쟁 승리를 위해서 실제로 도움이 되었을까?


프랑스 파리-월간 <역사> 9월호
2012년


올리비에 비비오르카


1942년 11월 8일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하에 영미 연합군이 모로코,알제리 해안에 상륙했다. 횃불작전을 성공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까? 틀림없이 그렇다. 연합군은 비교적 짧은 시간안에, 1915년 다다넬스 해협에서의 갈리폴리 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을 해냈다. 그들은 북아프리카를 해방시켰고, 이탈리아 공습을 위한 보급기지를 확보했고, 서유럽 재정복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것이 비시체제의 해체를 가속화시켰고, 다수의 프랑스 제국 영토가 연합국 진영에 합류하게 만들었다. 모스크바가 간청한 제2전선을 실제로 열지않고, 연합국은 소련에게 자신이 제3제국의 몰락에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연합군은 독일-이탈리아군을 지중해에서 몰아냈고, 1942년 10월 영국군에게 롬멜 원수의 북아프리카 군단이 엘알라메인에서 참패했다.결국, 횃불작전은 결과적으로 긍정적이었다.


우선, 북아프리카 상륙은 전략적인 이익이었을까? 사실 미국은 이를 의심했다. 확실히 미국은 항상,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기습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아닌 독일이 자신의 주적이라 간주했다. 미국은 남북전쟁과 제1차세계대전 이래, 적의 취약지점 보다는 주요 보루를 공격한다는 전략적 유산에 충실했다. 미국은 결과적으로 주변부라고 평가되는 지역 보다는 유럽 대륙에서의 작전을 선호했다. 미군 작전기획자들은 이 전통에 따라, 1942년 가을에 쇠망치 작전이라 불리는 프랑스 브레스트 혹은 셸부르로의 상륙작전을 계획했다. 이 작전은 붉은 군대에 대한 독일의 압박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쇠망치 작전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 - 1942년 가을의 쇠망치 작전이란?- http://kk1234ang.egloos.com/2888198]


<영국측 주장의 승리>  


영국은 미국측 제안에 반대했다. 1941년 12월에 시작된 영미간의 군사전략 회의였던 아르카디아 회의 Arcadia Conference 때부터, 영국은 1941년부터 그들이 계획했던 북아프리카 작전을 선호했다. 이 전략에는 4가지 장점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으로 지중해에 대한 장악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수에즈로의 항로를 다시 열어, 멀리 희망봉으로 경유하는 것을 막아서, 대서양에서의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으로 비시 체제가 연합군 진영으로 넘어오는 것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작전으로 징병된지 얼마되지 않아서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미군 병사들이 실전경험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 합참의장 조지 마셜 장군이 쇠망치 작전을 지지했고, 해군의 킹 제독이 태평양 전쟁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7월, 영국 총리 처칠 편을 들어주었다. 이 작전을 통해 루스벨트는 스탈린의 노여움도 달래기를 희망했다. 스탈린은 영미의 제2전선의 부재로, 전쟁의 무게를 일방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붉은 군대라고 항상 불평해 왔다. 횃불작전으로 만약 그것이 없다면 유럽 대륙 가상 침공 작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수만의 병사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횃불작전 이전까지, 연합국은 패전을 거듭했고, 아시아의 홍콩,필리핀,싱가폴을 빼았겼고, 이런 상황에서 백악관의 주인은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에서 얻은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승리를 원했다. 이것이 더욱 절실했던 것은 미국이 1942년 11월 3일, 중간선거와 총선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월, 런던의 노포크 하우스의 사무실에서 작전 기획자들이 모였고, 8월 13일,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이 작전 지휘권을 받았다. 고안하고, 조직할 것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계획상으로, 연합군은 비교적 단순한 목표를 추구했다.그들은 롬멜을 궤멸시켜, 지중해 지배를 보장하려 했다. 이같은 2중의 목표를 위해서는 가능한 빨리 튀니지를 장악해야만 했고, 이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로부터의 주축군 증원을 막기위한 것이었다. 영국의 지지를 받은 아이젠하워는 알제리로 상륙지점을 제한하자고 제안했다 : "나에게 튀니지가 제일 중요해서, 우리의 상륙지점은 가능한 튀니지에 가까운 곳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조지 마셜 참모총장과 미국 국방부가 작전계획에 모로코를 포함시켰다 : 그들은 히틀러가 스페인을 경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올 것이라 우려했고, 비시가 모로코에서 알제리의 연합국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했다.

작전 논의 과정에서 신중파가 승리했다 : 영미 연합군이 모로코의 3곳 그리고 알제리의 6개 해안에 상륙했다. 이 계획은 힘의 집중이라는 초보적인 원칙에 위반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군대를 9곳으로 분열시켜, 최대 1400 킬로미터 떨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2개의 함대가 10만명 이상의 병력을 수송했다. 1함대는 100여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었고, 그중 2/3는 함대 호위용이었고, 영국을 출발 알제리로 향했고, 주로 미군 병사들을 2800마일 수송했고, 수송에는 대략 15일이 걸렸다. 2함대는 102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29척이 군 수송선이었고, 미국 버지니아의 노포크를 출발, 모로코로 향했고, 4800마일을 이동, 33000명의 병사를 상륙시켰다. 두개의 함대는 독일의 잠수함이 자신의 최종 행선지를 눈치채지 못하게 속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대 잠수함 전술의 대가, 영국은 독일이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8개의 계획을 수립했다.
         


덧글

  • 토나이투 2012/08/27 17:37 # 답글

    2차대전때 아프리카 전선도 이렇게 의구심이 드는 전선인데
    1차대전 아프리카는 그야말로 암흑이었습니다...

    만약 이탈리아가 추축군이 아니었다면 아프리카라는 전선 형성에 큰 변화가
    있을거라는 제 사견을 제시해봅니다
  • 파리13구 2012/08/29 08:44 #

    알겠습니다.
  • 행인1 2012/08/28 10:40 # 답글

    왜 영미 연합군이 북프랑스가 아닌 북아프리카에 먼저 상륙했는지에 대한 정치/군사적 배경이로군요.
  • 파리13구 2012/08/29 08:45 #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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