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작전]"풍향이 바뀌다!" 레지스탕스

[제2차세계대전]횃불작전 70주년


[제2차세계대전]
[횃불작전]


"풍향이 바뀌다!"


프랑스 파리 -월간 <역사> 9월호
2012년


1942년 11월 9일,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는 프랑스인들에게 영국-미국 연합국의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상륙 소식을 전했다 : "미국과 영국이 우리의 북아프리카를 공격했다. 페탱 원수께서는 공격을 규탄하고, 이에 대한 레지스탕스(저항)를 명령하셨다." 이같은 의미의 왜곡이 비시체제 언론의 특징이었다 : 여기서 "저항"이란 나치 독일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적인 연합국에 저항하라는 것이었다. 1940년의 독불간의 휴전협정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 프랑스는 중립이다 ; 프랑스는 자신의 중립을 침해하는 공격에 맞설 수 있는 저항권을 가진다. 단 주축국 군대에 대해서는 예외이다. 11월 10일, 북아프리카의 페탱 군대가 이 보다 이틀전에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한, 미국과 영국군을 격퇴시키려 노력할 동안, 페탱 원수는 프랑스와 미국간의 외교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역자주- 미국이 페탱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한 것이 드골에게는 항상 불만이었다]


처칠이 원했고, 루스벨트가 받아들인, 연합국의 북아프리카 상륙은 제2차세계대전의 거대한 전환점들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로제 마탱 뒤 가르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갑자기 풍향이 뒤바낀 것 같다." 사실, 횃불작전의 결과는 상당한 것이었다. 단기적으로, 주축국의 힘이 지중해에서 위축되었다. 1943년 7월 10일, 연합국이 시칠리아에 상륙, 이탈리아 해방전쟁을 시작했다 ; 그리고 1944년 8월 15일의 프랑스 프로방스 상륙으로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완성시켰다.


[횃불작전에 대한 스탈린의 반응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시오 - 스탈린, 횃불작전에 대해, 1942년 11월 주소- http://kk1234ang.egloos.com/2720294 ]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유럽에서의 상륙을 대신한, 이 작전의 타당성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탈리아 전투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 처럼, 연합국의 자원을 심각하게 소진시켰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준비에 차질을 줄" 정도였다.


작전의 전략적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시각에서 본 상황은 대반전이었다. 연합국의 북아프리카 상륙에 대한 대응으로, 히틀러는 1940년의 독불 휴전협정을 깨기로 결심하고, 지중해 해안 전역을 점령했고, "자유 지역"이라 불리던 비시 프랑스의 남부 지역을 점령했다. 이같은 1940년 휴전합의의 파기는 페탱 원수가 독일에 대한 굴종을 끝낼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연합군측에 가담하는 대신에, 프랑스 함대는 툴롱에서 바닥에 구멍을 내서 자침 自沈 했다. 이렇게 함대와 제국을 상실한, 비시의 프랑스 국가 État français 는 히틀러에 맞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1942년 12월 31일의 일기에서, 마르탱 뒤 가르는 "2000년의 학생들에게 이같은 비시의 정책, 즉 우리에게 너무도 나약하고, 너무도 품위가 떨어지고, 너무도 굴욕적이고, 경멸할 만한 비시의 정책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고 자문했다.


횃불작전 성공이후 북아프리카의 실권을 장악한 미국은 자신이 지지한 다를랑 제독이 암살된 이후에도, 지로 장군을 북아프리카의 최고 민간군사 행정관으로 임명했고, 따라서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운명적인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드골은 다음과 같은 위기 의식을 드러냈다 : "모든 문제는 우리와 아무것도 아닌 지로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미국 정부사이에 있다." 아무튼, 세계 도처에서 온 병사들이 싸운 ,북아프리카의 모래속에서, 프랑스는 체면을 되찾기 위한 시도에 나서게 될 것이다.     


[드골과 지로의 강제결혼에 대해서는 다음글을 참고 - 카사블랑카 회담, 드골과 지로의 강제결혼... 주소 http://kk1234ang.egloos.com/2550628]




덧글

  • 행인1 2012/08/27 13:18 # 답글

    '비시 프랑스'가 형식상의 독립조차도 유지하지 못하게 된 시점이지요. 그나저나 툴롱의 프랑스 함대가 탈출하여 연합군에 가담하면 프랑스 처지가 좀 나아졌을런지...
  • 파리13구 2012/08/27 13:23 #

    글쎄요...^^
  • 셔먼 2012/08/27 14:19 # 답글

    당시 미국이 비시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유지했던 이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 파리13구 2012/08/27 14:28 #

    처칠의 영국과는 달리, 미국의 루스벨트를 비시 프랑스와의 관계단절을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페탱의 비시체제의 성격이 여전히 불분명했고, 형식적으로는 중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41년 12월까지 미국은 중립국이었고,

    또한 루스벨트가 영국처럼 비시가 아닌, 드골의 자유프랑스를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실체가 불분명한 드골을 루스벨트는 전쟁 내내 무시하게 됩니다.

    루스벨트는 비시를 통해 나치 독일을 견제하려고 했습니다.


    추후에 관련 주제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
  • 셔먼 2012/08/27 14:32 #

    설명 감사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