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라인 왕비 사건-19세기판 다이애나 왕세자비?" 유럽외교사

"나폴레옹 전쟁과 영국여성"


[대영제국]
[영국여성][페미니즘]

"캐롤라인 왕비 사건-19세기판 다이애나 왕세자비?"


캐롤라인은 영국왕 조지4세의 왕비였다. 만약 헨리8세의 시대였다면, 간통혐의를 받았던 캐롤라인은 앤 볼린,캐서린 하워드 처럼 참수의 운명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남았고, 그녀에 대한 대중의 사랑을 증명해냈다. 이같은 앤 볼린과 캐롤라인의 엇갈린 운명은 그 동안의 영국사회의 변화와 특히 영국여성의 지위향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캐롤라인이 웨일즈 왕자,조지(후일의 조지4세)와 결혼한 것은 1795년이었다. 1795년 처음으로 대면한 캐롤라인과 조지는 서로에게 실망했지만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796년 장녀 샬럿 오거스타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고 샬럿은 왕실이 맡아 기르게 되었다. 캐롤라인이 정부를 두고 사생아까지 낳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부 고관들로 이루어진 조사단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그들은 소문의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조지는 캐롤라인이 샬럿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궁정 행사에서 배제시켰다. 왕태자비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채 소외되어 있던 캐롤라인은 1813년부터 유럽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1820년, 남편이 조지4세로 즉위하자, 캐롤라인은 영국으로 귀국, 자신이 여왕임을 주장했다. 그녀를 제지시키기 위해서, 왕은 그녀가 간통혐의로 재판을 받을 것이라 주장했다. 14세기 법에 따르면, 여왕의 간통은 반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일부 왕당파들은 그녀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생일대의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어떻게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린다 콜리에 따르면, 당시 캐롤라인을 지지하는 영국의 중산층,노동계급 여성들의 전국적인 항의가 조직되었다고 한다 : 14000명의 브리스톨 여성, 9000명의 에딘버러 여성, 11000명의 쉐필드 여성, 17600명의 런던 유부녀들, 3700명의 핼리팩스 숙녀들, 7800명의 노팅햄 여성들, 9000명의 엑스터 여성들 그리고 수 만명의 기타 여성들이 여왕을 지지하는 선언에 서명했다. 이 사건은 여성의 이해가 달린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여왕의 덕성을 옹호하고, 조지4세를 비난했고, 만약 왕실의 이혼이 승인된다면, 다른 모든 영국여성들의 결혼상의 지위도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에서 과거의 간통이 이혼사유로 인정된다면, 이혼 소송이 급증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 캐롤라인 왕비 추문 사건은 과거 프랑스에서의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 처형 사건을 연상시키는 것이었고, 이같은 야만이 영국땅에서 자행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당시 항의에 참가한 영국여성들의 인식이었다고 한다.


여성들의 거센 항의와 함께, 휘그파와 급진파 정치인과 영국 언론이 친-캐롤라인을 표방하게 되자, 조지4세와 영국왕실은 결국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같은 캐롤라인 왕비의 삶은 최근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들며, 그녀가 헨리8세 치세의 앤 볼린 같은 참수의 고통을 모면한 것에는, 당시 영국사회에서 여성의 집단적 힘이 만만치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남편이 영국 왕세자라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여성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현실을 영국여성들이 깨닫게 만든 19세기초적 사례라 하겠다.




덧글

  • 2012/08/23 19:1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8/24 04:1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rumic71 2012/08/24 16:46 # 답글

    그리고 왕실은 정보부를 조직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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