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8세의 대외정책은 성공적이었나?" 유럽외교사

헨리7세의 대외정책



[유럽외교사]


헨리8세의 대외정책


출처- Henry VIII and His Foreign Policy
http://www.feltonfleet.co.uk/departments/history/Resources/Henry%20VIII%20and%20His%20Foreign%20Policy.pdf


16세기초, 유럽을 지배한 것은 4명의 군주였다. 교황, 프랑스의 루이12세. 신성로마제국황제 막시밀리안1세 그리고 스페인의 페르난도 였다.


헨리8세의 대외정책은 스스로의 욕망에 이끌렸고, 잉글랜드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들려는 바람의 산물이었다. 그는 잉글랜드가 주권 민족국가가 되기를 원했고, 다른 나라들에 의존하지 않는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우선, 그는 잉글랜드왕의 전통적인 정책을 따랐고,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면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헨리 치세의 첫 20년, 1509-1529년은 대외정책 중심이었고, 바로 이 시기에 토머스 울지 Thomas Wolsey 추기경이 중요 인물로 부상했다.


1511년, 헨리는 그의 입장을 강화시킬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의 루이12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교황 Julius II 율리오 2세 (재위 1503-1513)가 위협을 느꼈다. 교황은 스페인과 신성동맹 a Holy League 을 결성했다. 헨리는 지원을 제공했고, 1511년 11월에 신성동맹에 가담했다. 헨리는 도르셋 후작 the Marquess of Dorset 을 사령관으로 하는 12,000명의 병력을 프랑스 남부로 파병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스페인 동맹군이 도착하기를 수주 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잉글랜드 모르게, 스페인은 이미 프랑스를 패배시키고, 평화를 맺었다. 헨리는 모욕을 느끼고, 실망했다. 하지만, 그는 군주의 변덕이라는 16세기 유럽 정치술의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1513년, 헨리는 다른 기회를 잡았다. 이번에 헨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프랑스 원정을 단행했다. 기네게이트 Guinegate 에서, 그는 스퍼스 전투 The Battle of The Spurs 로 알려진 전투에서 프랑스를 패배시켰다. 투르내 Tournai 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헨리의 부재를 틈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4세 James IV of Scotland, (1473-1513) 가 잉글랜드 침공을 결심했고, 프랑스와의 오랜 동맹을 부활시켰다. 그가 헨리의 누이인 마거릿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에 서리 백작 The Earl of Surrey 이 북쪽으로 진군하여, 스코틀랜드군을 1513년 9월 9일의 플로덴 전투 Battle of Flodden 에서 격파시켰다. 제임스와 다른 스코틀랜드 지도자들이 전사했다.  


다음 10년동안 헨리의 대외정책은 호전적인 정책이 잠잠해지고, 평화 지향적이었다. 전쟁은 너무 값비쌌고, 헨리는 자금 부족을 느끼게 되었다.


평화 1513-1523


토머스 울지가 헨리8세의 대외정책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헨리와 울지는 잉글랜드를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울지는 교황이 되고자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지위를 이용했다. 그는 그의 야망 달성에 도움이 될 어떤 국가 혹은 인물과도 손을 잡으려했다.


1514년, 울지는 53세의 늙은 프랑스왕 루이12세와 헨리의 누이 메리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는 통풍에 시달리는 노인과 젊은 아름다운 여성간의 순전한 정략결혼이었다. 명백하게, 메리는 루이가 사망하고 난 후 자신이 원하는 남자와 결혼을 허락받는다는 조건하에서 이 결혼에 동의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11주만에, 결혼의 흥분이 루이에게는 과도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루이12세의 사망으로, 영-불동맹이 붕괴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울지와 헨리는 빠르게 대응해야만 했다.


1518년 10월 3일, 울지는 런던에서 회의를 개최, 이 회의에 교황,프랑스왕,스페인왕,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리인과 헨리8세가 참석했다. 이것은 헨리의 주요 외교 업적이었다. 회의에서, 헨리와 새로운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아1세 Francis I (1494-1547) 가 만나야 한다고 결의되었다.


1520년 6월 7일, 헨리와 프랑수아가 금란의 들판 The Field of Cloth of Gold 에서 만났다.

<금란의 들판>

금란의 들판 The Field of Cloth of Gold 1520년 6월 7일-6월 21일


헨리와 프랑수아가 프랑스에서 만났다. 회의는 장관이었다. 그것은 잔치무대였다. 들판은 곧 임시 도시가 되었고, 아름답게 장식된 대형 천막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마상시합,마상 창시합,축하연,음악회 등이 열렸다. 헨리는 거의 5000명에 달하는 수행원과 함께, 3000마리의 말, 붕장어 7000마리, 양 2014마리, 왜가리 312마리, 70리터의 겨자, 100파운드의 크림을 가져왔다.  


금란의 들판 이후


이같은 회의의 사치가 무위로 돌아갔다. 프랑수아는 신임황제 카를5세와의 전쟁을 구상했고, 울지는 카를5세와의 비밀회담을 결심했다. 울지는 자신이 교황이 되는데 카를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1520년, 카를과 헨리가 반-프랑스 조약을 맺었다. 1525년, 카를이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1세 군대를 격파했다. 헨리는 이를 파리로 진격할 기회로 간주했고,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다. 하지만 카를과 헨리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고, 카를은 헨리가 프랑스를 패배시키는데 아무 것도 하지않고, 프랑스 왕위라는 상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정책의 전환


울지는 즉시 전술을 바꾸고, 프랑스,잉글랜드,교황의 반-황제 동맹을 추진했다.


1527년 카를5세가 로마로 진군, 교황 클레멘스7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에 따라 울지의 동맹은 붕괴했다. 이제 카를이 주도권을 잡았다. 울지는 인기를 잃었고, 그의 정책은 실패했고, 비용이 많이 나가는 것으로 입증되었고, 잉글랜드의 의회와 백성이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바로 이 상황에서, 헨리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헨리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교황이 허락해야 이혼할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교황은 아라곤의 캐서린의 조카인 카를5세의 포로였던 것이었다. 매우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이혼 문제가 해결된 이후, 헨리는 국내문제에 집중했다. 그의 재정상태가 나빴고, 그는 이를 시정해야 했다.


아일랜드


평온한 시기 동안 헨리는 아일랜드 문제에 집중했다. 교황이 헨리2세에게 아일랜드 군주 “Lord of Ireland”의 직위를 주었다. 로마와의 관계단절 이후, 헨리8세는 이를 아일랜드 국왕 "King of Ireland" 칭호로 변경했다. 헨리는 교황이 아일랜드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지 않을까하고 두려워했고, 그는 수도원 토지를 그들에게 뇌물로 주었다. 1537년, 킬데어 백작의 반란이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그와 5명의 친척이 처형되었다.


토머스 크롬웰 THOMAS CROMWELL 의 대외정책


대외문제는 1538년까지 비교적 평온했다. 바로 그해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가 10년간의 휴전에 서명했다. 동시에 교황이 칙령을 발표, 헨리가 더이상 잉글랜드 국왕이 아니라 선언했고, 가톨릭 세력에게 그를 공격하라고 요청했다. 헨리는 따라서 그를 제거하기 위한 가톨릭 십자군 결성 가능성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헨리와 울지의 후임, 토머스 크롬웰은 유럽에서 동맹을 찾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나라는 침공 대비를 위한 준비를 했다.


한가지 해법은 헨리가 네번째 부인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프랑수아1세의 딸, 마라렛과 귀즈 공의 딸 마리가 후보였지만, 헨리의 여성 편력과 로마와의 관계 단절 때문에, 이 숙녀들은 결혼에 대해서 더 현명하게 생각했고, 이를 거부했다. 이에, 토머스 크롬웰이 클리브즈의 앤 Anne of Cleves과의 결혼을 제안했다. 이는 유용한 동맹이 될 것으로 보였다. 헨리는 홀베인이 그린 안느의 초상화를 보고난 후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초상화가 안느를 실제보다 예쁘게 그린 것이었고, 헨리가 그녀를 직접 대면했을때, 그는 매우 실망하고, 격분했다. 4달만에, 그들은 이혼했고, 크롬웰의 목이 날아갔다.


말년- 외교를 헨리가 직접 관장하다.


건강이 나빠진 헨리는 다시 한번 전쟁에 몰두하게 되었다. 헨리는 스스로 대외정책을 주관하기로 결심했다. 1542년 여름,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가 휴전을 파기하자, 헨리는 다시 한번 프랑스 왕위를 주장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프랑스 문제에 나서기 전에, 헨리는 스코틀랜드라는 위협을 미리 제거하고자 했다. 헨리는 스코틀랜드 국경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즉각적인 침공 위협과 함께, 헨리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5세에게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사실상의 위성국가로 만드는 조약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자연스럽게, 제임스는 이를 거부했다. 1542년 11월 23일 스털링 모스 the Battle of Stirling Moss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가 패했다. 제임스5세는 몇 일 후에 사망했다. 그는 생후 7일된 어린 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남겼다. 헨리는 메리를 그의 아들 에드워드와 결혼시키라고 요구했다. 자연스럽게, 스코틀랜드는 이를 거절했고, 전쟁이 계속되었다. 에딘버러가 약탈당했고, 스코틀랜드 가톨릭 지도자, 비튼 추기경이 처형되었다.


프랑스


1543년, 헨리와 카를5세가 조약을 체결, 같은해 양국이 프랑스를 침공하자고 합의했다. 헨리가 프랑스를 침공, 불로뉴를 장악했다.

하지만, 카를과 프랑수아가 서로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노포크 와 서포크 공 Dukes of Norfolk and Suffolk 의 지휘하의 잉글랜드군은 칼레로 퇴각해야 했다. 여기서 적군 5만이 그들을 포위했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군은 프랑스에서 철수,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1545년, 잉글랜드는 영불해협으로부터의 침공에 다시 대비해야 했다. 7월 프랑수아1세가 200척의 배로 해협을 도하하려고 했지만, 날씨의 방해로 이를 단념해야 했다.


이상의,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헨리는 200만 파운드를 지출했고, 그의 국고는 다시한번 비게 되었다. 그리고 헨리는 곧 사망했다.


헨리8세의 대외정책은 성공이었나?


헨리는 잉글랜드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원했다. 이 목적으로, 그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했을 뿐이었다. 그의 스코틀랜드 원정은 군사적으로 성공이었지만,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 지배하에 두는데는 실패했고, 그는 아들 에드워드를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에게 장가보내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전쟁으로 국고 수백만 파운드가 소진되었다. 하지만, 그의 해군력 증강 사업 덕분에, 전함은 7척에서 그의 통치말기에는 33척으로 증가했다. 헨리는 해군력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헨리의 이같은 노력은 이후 매우 주요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헨리8세는 자주 "영국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며, 이는 영국 해군의 해상 지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덧글

  • 셔먼 2012/08/14 14:23 # 답글

    카를 5세의 뒷통수 신공 때문에 실패한 계획들이 많았군요.;
  • 파리13구 2012/08/14 14:24 #

    그렇습니다.
  • ChristopherK 2012/08/14 18:58 # 답글

    역시 헨리8세는 영국에서 은근히 인기많고 말많은 왕이군요.
  • 파리13구 2012/08/15 10:10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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