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전쟁술 1494-1529 (10) 유럽외교사

이탈리아의 전쟁술 1494-1529 (9)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스위스는 화기를 장창의 보조무기로 간주했다. 프랑스 샤를8세를 위해 싸운 스위스 용병의 단지 1/10만이 화승총병 arquebusiers 이었다. 비슷한 비율이 피렌체에서도 지켜졌고, 피렌체의 새로운 민병부대는 1506년 결성되었지만, 실제 비율은 이보다 더 낮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1507년 독일에서 베네치아 대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화기는 독일 용병들에게 더욱 무시를 당하고 있었고, 400명의 부대 중 화승총병은 대체로 25명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10:1의 비율은 1510년에 베네치아군에서 싸우던 이탈리아 보병에게 통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승총병의 수는 느리게 증가했고, 이탈리아 전쟁 초반 20년 동안 꾸준히 증가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1511년에 밀라노를 침공한 스위스군에서의 화기와 장창의 비율이었다. 4명 중 한명이 화승총을 소지했고, 화승총병들은 침략자들의 격퇴를 당한 소규모 교전에서 더 적극적으로 싸웠다.


스위스군에서 화승총이 소극적으로 사용되었고, 화기의 비율이 이후 점차적으로 줄어든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해의 스위군 구성은 본질적으로 실험에 불과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자신감의 결여 때문에 스위스군이 화승총병을 늘린다는 도전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라 결론내릴 수 있다. 당시 시민출신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이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1510년 프리우리 Friuli 로부터의 한 편지는 지역민들이 화승총 사용 전문가들이라고 전하고 있고, 1514년 비첸차 전투 the battle of Vicenza 에서 베네치아를 위해 싸운 많은 농민군들이 화승총을 많이 지급받았다고 한다. 황제의 독일 화승총병들이 화기 사용에서의 경험미숙을 비난당한 사실을 보면, 소화기 사용이 새로운 군 계급 사이에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1494년 이전에 (이탈리아 전쟁 발발 이전에) 스페인군은 소화기의 중요성을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대장군 곤살로 데 코르도바는 부대의 1/6을 화승총으로 무장시켰고, 이같은 높은 비율이 나폴리에서의 초기 전투에서 그의 군에게 우위를 제공했다. 이같은 우위가 드러난 것은 스위스 용병의 명성이 자자했던 개활지에서가 아니라, 매복과 방어 장애물에서의 전투 같은 스위스와 독일 용병들이 적응하기 거부하는 전투에서 였다. 스위스군 전술의 비융통성이 스페인을 위한 기회였고, 이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화기의 발전을 그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평가할 수 있다.


1502-1503년에 있었던 두 개의 전투에서, 앞으로 화승총병이 중요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 예견되었다. 첫번째 전투는 느무르 Nemours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공격에 맞서 페드로 나바로 Pedro Navarro 가 카노사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것이었다. 총700명 중 200명이 화승총병이었던 요새에서, 그는 3일간의 포격을 견뎠고, 이 포격으로 요새의 성벽이 실제로 파괴되었음에도, 수적으로 압도적인 적군이 거의 매시간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막아냈다. 방어는 맹렬했고, 마지막 요새의 거점이 함락직전에 있었을때, 프랑스 지휘관이 그들이 명예롭게 항복하라고 권하자, 그는 너무 소수의 병력이 그렇게 오랫동안 저항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스페인 화승총병의 진가가 다시한번 입증된 것은 발레타 수비대가 카노사로 진격 중이던 느무르의 군대를 후방에서 공격했을 때였다. 기병의 지원을 받는 소수의 화승총병 부대가 적을 추격, 측면을 공격, 집중 사격을 가해서 심각한 피해를 주었던 것이었다.

대장군 곤살로의 나폴리 전투들과 이후 12년 동안, 스위스,독일,이탈리아 군에서의 화승총 비율이 느리지만 꾸준히 상승했지만, 휴대 화기의 역할은 장애물 방어로 거의 한정되었다. 1503년의 세리뇰라 전투 battle of Cerignola는 장창부대 공격에 맞선, 참호 진지의 성공적인 방어였다. 이 전투에 주목하는 것은 방어가 주로 스페인 화승총병의 공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체사레 보르자의 군에 맞서, 세리 시를 장기간 동안 지킬 수 있었던 것도 화승총의 효율적인 사용 덕분이었고, 증언에 따르면, 1509년 막시밀리언의 공격에 맞선 파두아의 성공적인 방어에서의 많은 화승총병들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1512년 브레치아의 베네치아 요새에는 1500명의 화승총병이 있었다고 한다. 3년 후, 같은 요새는 화기로 잘 무장된 스페인과 독일군의 포위공격을 용감하게 막아냈다. 화승총병이 1513년 베로나의 성벽에서 알비아노를 격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같은 해 있었던 세번의 주요 전투들에서 - 라벤나,노바라,마리야노 .Ravenna, Novara, and Marignano-에서 모두 참호화된 요새에 대한 공격이었고, 수비군이 화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라벤나에서 스페인군은 수레에 올라탄 화승총병으로 수비했지만, 독일군이 진지를 돌파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노바라에서 스위스는 독일 화승총병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었고, 화승총병이 무력화될 때까지 승리를 얻지 못했다. 마리냐노에서 프랑스 화승총병들과 석궁병은 연속적이고 뛰어난 발사 대형을 발전시켰고, 자신의 무기를 교대로 발사했고, 스위스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면서, 화승총이 바로 그날 처음으로 장창의 우세에 도전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덧글

  • 셔먼 2012/08/11 17:46 # 답글

    아, 그러고 보니 낭시 전투에서도 스위스 용병의 화승총 비율이 매우 적었죠!
  • 파리13구 2012/08/11 18:30 #

    그랬군요...
  • 零丁洋 2012/08/11 23:43 # 답글

    미국이 인디언과 전쟁할 때 연발권총이 등장한 이후 미군과 인디언이 비등해졌다고 하더러고요. 당시 소총은 사거리, 연사능력 모두 활에 뒤떨어졌다죠. 연발권총도 연사능력이 우월해진 것이지 사정거리는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죠.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6 대표이글루

2015 대표이글루

2013 대표이글루

2011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방문자

광고

2018 대표이글루_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