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프랑스가 화승총 도입을 주저한 이유는?" 유럽외교사

16세기 전쟁의 창과 총 전술 (1)


[이탈리아 전쟁]

16세기 프랑스의 화기에 대한 문화적 반감에 대해서...


출처- 바움가트너 Baumgartner의 "근대 초기에 프랑스가 화기 기술 채택을 주저한 이유"

Baumgartner, Frederic J. The French Reluctance to Adopt Firearms Technology in the Early Modern Period, in The Heirs of Archimedes: Science and the Art of War Through the Age of Enlightenment, eds Brett D. Steele and Tamera Dorland.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2005.


마키아벨리의 화기와 같은 신 무기 기술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서는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는 군사 작전이 화기와는 무관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화기란 농민을 겁주는데에만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대포도 마키아벨리에게 인상을 주지 못했고, 적어도 야전 무기로서는 그랬다. 포탄은 적의 머리 위로 날아가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대포가 발사되어도, 재장전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걸렸고, 특히 적의 기병이 포가 재발사 되기도 전에 포병을 죽일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정예 보병이 포병을 상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치 과거에 로마 군단이 한니발의 코끼리 군단을 상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화승총병을 로마의 보조 경보병-궁병과 투석병 같은 부대로 간주했고, 따라서 전투에서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라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장창 밀집 방진으로 구성된 스위스 용병을 로마 군단의 진정한 후계자로 간주했다. 스위스는 로마군단이 궁병 같은 보조 경보병 부대를 활용했듯이, 총병을 보조부대를 이용했다는 것이었다.


16세기 프랑스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전쟁론이 그의 군주론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관점은 다른 인문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가령, 프랑수아 라블레는 군 기술에 정통했지만, 충격 전술을 이용할 수 있는 기병을 전장의 주력으로 간주했고, 총병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몽테뉴는 칼은 소유자의 용기에만 의존하지만, 화기는 화약,바퀴,포탄의 성공적인 성능에 의존하고, 만약 이들 중 하나라도 잘못되면, "당신의 운명을 망가트릴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몽테뉴는 고대 투석병의 정교함과 화기의 저열한 적중율을 대조했다. 그는 화약 무기의 장점은 소음뿐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리고 공포감은 익숙해지면서 점점 감소될 것이라 보았다 : "나는 화기가 무기로 매우 무용하다고 보고, 우리가 언젠가 이를 버리게 될 것이라 희망한다."


르네상스 시기 동안의 화약 무기 문화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잉글랜드,독일,이탈리아,스페인에서 보다, 프랑스에서 화약무기에 대한 언급이 더 적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프랑스가 화기를 거부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보다는, 화약 무기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데 실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랑스 귀족도 화약 무기를 거부하는 독자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화기는 비-기사도적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화기는 평범한 보병이 기마 귀족을 원거리에서 죽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기마 전사에게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 일반적으로 기사는 백병전에서 자신의 무술을 뽐내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프랑스 귀족 바야르는 공포심이 없는 기사로 유명했고, 자신의 포로가 된 화승청병과 포병을 학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복수에 불타는 화승총탄에 맞아, 1524년에 전사했다. 하지만, 바야르의 사례는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공유하던 정서였다.


1574년 프랑스군 원수로 승진했던, 브래즈 드 몽뤽은 회고록에서 1570년에 그가 화승총 총탄에 의해 얼굴에 부상을 당했다고 적었다. 이 책에서, 강인한 늙은 프랑스 장군은 50년의 군경험을 되돌아 보았다. 그는 그동안 보병을 지휘했다. 아마도, 총탄으로 전사한 그의 세 아들을 떠올리면서, 그는 화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감히 신에게 고하건대, 이같은 가증스러운 물건이 절대로 발명되어서는 안됐다고 말하고자 한다. 만약 그랬었다면, 너무도 많은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최고의 겁장이들, 비겁자들에게 살육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들 비겁자들은 멀리서 총탄을 가지고 납작 업드린채, 그들이 죽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처다볼 수 조차 없었다. 이렇게, 우리를 서로 죽이게 만든 것이 바로 악마의 발명품이었다."


이렇게 몽뤽에 따르면, 화기란 악마의 발명품에 다름아니었고, 이는 16세기 프랑스에서의 화기 도입에 대한 거부감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문화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지휘관 몽뤽은 1523년에 자신의 부대에 총병을 배치시켰다고 한다. 다만, 프랑스인은 총병으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스페인 탈열병들을 화승총병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1544년의 크레졸 전투에서, 몽뤽은 그의 휘하에 700-800명의 화승총병을 배치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투 개시를 위한 총알받이 "enfants perdue 잃어버린 아이들" 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다른 책에서도 화기에 대한 이같은 반감이 보인다.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화승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에 분개한, 파비아 전투의 한 참전용사는 화기는 이교도와 싸우는데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544년, 미셸 담부아즈는 권총을 이용하는 귀족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 주장했다. 한 대사는 1559년, 자국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프랑스 귀족들이 긴 얇은 횡대를 유지하면서, 창과 칼을 들고 싸우기를 주장하는 것은 다른 식으로 싸우는 것은 비겁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30년 뒤, 프랑수아 드 라 누 Francois de La Noue는 여전히 이같은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창으로 싸우는 것만이 중기병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주장했고, 화기는 악마의 도구로, 프랑스 왕국을 무덤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700-800의 중기병으로 18,000의 화승총병을 제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권총이 이미 기병의 주요 무기가 된 상황에서, 라 누는 권총이 창기병에게 효율적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결국 프랑스는 적국 스페인에 비해, 신 무기인 화기를 더 늦게 도입하게 되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점은 대포의 신기술 도입에서는 앞서간 프랑스가 소화기의 도입 및 개량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이같은 소극성은 아마도, 프랑스 귀족의 집단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보이고, 그들은 창과 칼을 들고 ,말위에서 싸우는 것을 명예로 간주했다. 16세기 프랑스 왕정은 바로 이들과 견해를 같이했고, 새로운 화기 도입에 소극적이었다. 프랑스의 전쟁 교리는 오랫동안, 프랑스 병사들은 날카로운 무기로 싸우는 충격 전술 전투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같은 화기 도입에 대한 프랑스의 소극성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을까? 외국인 총병과 계약하기 위해서, 16세기 프랑스 왕실의 금고가 고갈되었다. 1559년 앙리2세의 사망 당시, 보병의 절반이 용병이었고, 그 대부분이 화승총병이었다. 프랑스 병력에 비해, 외국 용병에 대한 비용 지출이 더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 왕실의 부채는 43,500,000 리브르에 달했고, 이는 왕실의 연간 수입의 2.5배 였다.


16세기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이 전장에 충분하고, 훈련된 화승총병을 배치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충분한 화승총병만 있었다면, 농업의 부, 방대한 인구, 상대적으로 응집력있는 정부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가 1477년부터 1559년까지 유럽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스페인이 이 시기 동안 유럽 최대 강국이 되었고, 이는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 재산, 종교적 통일성 덕분이었다기 보다는, 강력한 화기 문화를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반대로, 비슷한 시기 동안, 프랑스는 중세의 군사적 유산을 청산하는데 소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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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umic71 2012/08/09 15:48 # 답글

    20세기에 이르도록, 영국군에서는 사병이 비록 적이라고 해도 장교를 직접 겨냥하는 게 매너위반이었다고 하죠.
  • 파리13구 2012/08/09 15:51 #

    아, 그랬군요...
  • 지나가던과객 2012/08/09 18:28 # 삭제 답글

    프랑스의 귀족적, 기사도적 전통에 마키아벨리아 로마 만세가 영향을 줬다는 얘기군요.
  • 零丁洋 2012/08/09 18:29 # 답글

    국왕이 국가를 전체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절대왕정이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늦은 것이 아닌가요?
  • shaind 2012/08/09 22:46 # 답글

    중세 쇠뇌가 받았던 처지와 그 이후의 전개를 생각해보면 앞으로 어떤 일어날 일을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 심 언 2012/08/10 01:59 # 삭제 답글

    혹시 43년 이전 소련의 군사 계급체제를 알수 있을까요?
    특히 NKVD 쪽은 어떻게 돼있는지요??
    감사합니다.
  • 심 언 2012/08/10 02:02 # 삭제 답글

    당시 NKVD 소장이라면 별 두개를 말하는 것인지요?
    아니면 소좌라는 의미로 우리의 중령 쯤 되는 것인지요.
    43년 이전에는 직책은 있지만 계급은 없지 않았나요???
  • 자이드 2012/08/10 02:31 # 답글

    만화나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유가 진짜였군요...
  • RuBisCO 2012/08/10 07:43 # 답글

    1차대전때만 그런게 아니고 훨씬 더 옛날에도 비슷한 짓을 했었군요.
  • 십니까 2013/10/15 00:27 # 답글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전역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아무래도 군사적 실패가 뼈저리다고 생각했는데, 마키아벨리는 좀 특이하게 루이12세의 정치적 실패때문에 이탈리아에서 밀려난 것이라고 지적하더군요. 뭐 군사적으로 실패했어도 정치적으로 신컨을 펼쳤으면 더 버텼을지 어땠을지는 몰라도...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총병에 좀 부정적이었나보군요.
    (이후에도 프랑스가 전유럽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는 건 알지만)16세기 이후에는 프랑스군이 어떻게 바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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