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전쟁술 1494-1529 (9) 유럽외교사

이탈리아의 전쟁술 1494-1529 (8)



샤를8세의 나폴리 정복이 아무런 저항없이 성공하고, 포르비노 전투에서 그가 월등한 적군을 손쉽게 물리치자, 이탈리아인들이 자신의 군사적 결함을 깨닫게 되었다. 용병대장 비텔로조 비텔리 Vitellozzo Vitelli 에게 처음으로 이탈리아 보병을 스위스식으로 개편했다는 영광이 돌아갔다. 체사레 보르자는 그의 로마냐 전쟁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토착군을 모집,훈련시켰다.


하지만, 효율적인 이탈리아 보병 양성을 위해서 가장 노력을 기울인 것은 바로 피렌체였다. 이같은 노력이 1495년부터 1509년까지의 피사와의 전쟁과정에서 있었다. 우선 피사를 용병으로 정복하려고 했고, 다음으로 동맹국 군대의 힘을 빌어 정복하려했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피렌체 정부는 상비군 a permanent standing army만이 이 과업을 달성할 수 있다고 결의했다. 이 부대의 모집과 구성은 마키아벨리의 믿음과 열정의 산물이었다 ; 1506년, 그 수는 10,000명에 달했고, 여기에 들어간 비용과 노력은 반란 도시 피사가 결국 항복한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피렌체 시민군의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보병에 대한 기병의 종속이었다. 피사와의 전쟁을 위해서, 피렌체는 토착 기병을 전혀 양성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10,000명의 군대는 보병과 보조 부대로 추가된 소수의 고용된 기병이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채택된 전투 대형이 밀집대형이었다는 것이고, 이 대형으로 스위스로부터 모방한 훈련체계에 따라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았고, 이를 교육시킨 것은 스위스 혹은 독일 전쟁술에 정통한 직업 군인들이었다. 더 중요한 점은 무기의 배분이었다. 100명당 70명이 장창병 pikemen 이었다 ; 나머지는 칼,단검,석궁이나 화기 fire arms로 무장했다. 그 시대의 가장 예리한 두뇌들을 보유하고 있던 한 국가가 스위스의 전술을 의식적으로 모방했다는 것 만큼, 스위스의 군사적 효율성을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없었다.


나폴리에서 프랑스를 위해 싸운 스위스군으로부터, 대장군 곤살로의 군인들이 몇가지 유용한 교훈을 배웠다. 그들의 가벼운 창이 스위스의 긴 창에 비해, 전투에서 열등하다는 점을 발견한 스페인군은 즉시 중무기 a heavier weapon 를 도입했다. 이 대체과정은 대장군 곤살로가 발레타로 퇴각할 때까지 완료되지 않았고, 부분적으로 이 이유 때문에, 그는 더 적절하게 무장한 독일 용병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연기했다. 미늘창은 스페인이 수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칼과 둥근 방패가 백병전에서 더 효과적이고, 그들의 이같은 결정은 이후 전투에서 옳은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 1512년의 라벤나 전투에서, 처음으로 스페인과 독일군이 격전을 벌였고, 이 전투에서 스페인 검병의 민첩함과 방패의 보호가 적의 창병을 뚫고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고, 적의 진형 깊숙히 침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운이 없게도, 운명이 스페인에게서 승리를 훔쳐갔지만, 당시 스페인군이 전장에서 대열을 유지한 채 진격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스위스 진형이 천하무적이라는 세상의 믿음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라벤나 전투- 1512년 4월 11일>

심지어 라벤나 전투 이전부터, 보다 분별있는 사람들은 독일과 스위스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들의 전술은 개활지,즉 앞이 시원하게 탁 트인 너른 땅에서만 유용했다. 자주 10,000명으로 구성되는, 그들의 거대한 진형은 좁고 울퉁불퉁한 지형에서는 불가능했고, 모든 면에서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자연적 혹은 인공적인 보호을 원했다. 이같은 사례가 발생하는 것은, 특히 도시를 공격하거나 방어할 때 였고, 그들이 자신만의 특수한 진형을 만들 수 없을 때 였다. 이같은 경우에,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낯선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고민하기 보다는 그들은 때로 공성전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전장에서는 무적인 스위스가 방어 혹은 장애물 돌파에는 부적합하다는 견해가 힘을 얻게 되었고, 스위스의 보수주의-이는 전쟁술의 옹호자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고-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보병의 명예를 훼손시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전쟁 동안, 스위스 스스로 도입한 변화는 하나 뿐이었고, 즉 장창의 길이를 1494년 10피트에서 1520년 18피트로 늘리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변화도 비판을 받았다. 창이 더 길어진 장점이 무게의 증가라는 단점으로 상쇄되었기 때문이었고, 대부분의 보병 지휘관들이 개선된 창을 수용한 반면, 스페인은 그들의 기동성을 훼손시킬 수 있는 변화를 거부했다.


<스페인 보병>

사실상, 추론능력,적응력과 더불어, 기동성은 스페인의 특별한 장점이었다. 스페인군은 전쟁술의 실천에서 뿐만아니라 문제 해결에서도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스위스와 독일이 자신의 전술 체계를 완고하게 고수하고, 입증된 결점을 무시할 동안, 스페인은 군사문제의 혁신가가 되었다. 스페인은 전쟁에서 오류가 없는 체제란 없고, 극복 불가능한 난관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탈리아 전쟁이 스페인에게 제공한 실험,개선,즉 승리를 위한 모든 기회들을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스페인의 이같은 정신적 물질적 유연성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보병의 화기 사용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덧글

  • 역시 2012/08/08 12:29 # 삭제 답글

    역시나.. 결론은 그대그때 상황따라 달라요 군요.

    그러다보니 전문직업도 생기는것일테고.

    이제 글이 어찌 마무리 되려나.
  • 零丁洋 2012/08/08 13:32 # 답글

    아라곤과 카스틸랴가 합쳐지기 전 스페인에 있던 두 왕국의 군대는 유사했나요? 카스틸랴는 무어인과의 오랜 전투로 상당히 군사기술이 발달했을 것 같은데? 실제 이탈리아에 개입한 왕국이 아라곤이라면 아라곤 만으로 스페인 군대의 특징을 일반화할 수 있나요? 기동력 중시나 전략 전술의 유연성은 당시 지역적 개방성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 파리13구 2012/08/08 13:57 #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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