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대장] 페를난도 프란체스코 다발로스 유럽외교사

[용병대장]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


<페스카라 후작, 페를난도 프란체스코 다발로스 Fernando Francesco Davalos, marquis of Pescara>

[이탈리아 전쟁]
[용병대장]


페르난도 프란체스코 다발로스, 페스카라 후작(1489-1525년 12월)은 스페인계 이탈리아 용병대장이었다. 스페인군 장군으로, 그는 이탈리아 전쟁에 참가했다.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 그는 프랑스 포로가 되었지만, 캉브레 동맹전쟁의 결과에 따라, 석방되었다. 그는 합스부르크-발루아 전쟁 동안 합스부르크군의 총사령관이었고, 비코카와 파비아 Bicocca ,Pavia 에서 프랑스를 패배시켰다.

페르난도는 나폴리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가문은 스페인 아라곤 출신이었고, 알폰조5세의 장군이자 그의 할아버지, 이니고 다발로스가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했다. 페르난도의 아버지는 알폰조였다.


6세의 나이에, 소년 다발로스는 파브리지오 콜로나 Fabrizio Colonna 장군의 딸, 비토리아 콜로나 Vittoria Colonna와 약혼했고, 1509년에 결혼했다. 나폴리의 아라곤파 귀족이었던 그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가톨릭의 페르난도를 지원할 수 밖에 없었다. 1512년, 그는 라벤나 전투에서 경기병을 지휘했고, 부상을 입고, 프랑스 포로가 되었다.결혼으로 그와 친인척관계에 있었던, 프랑스군 고위 장성인, 이탈리아인 트리불지오의 개입으로, 그는 6000두카트의 몸값을 치르고 석방되었다.

[참고- Battle of Ravenna 라벤나 전투 1512 -라벤나 전투는 1512 4 11일의, 신성동맹과 프랑스군의 싸움이었고, 이탈리아 전쟁의 캉브레 동맹전쟁의 주요 전투였다. 프랑스가 스페인-교황군을 전장에서 몰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승리가 그들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세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고, 프랑스는 1512 8월에 이곳으로부터 철수하게 되었다.]

그는 1513년 10월 7일의 비첸차 전투에서 스페인 보병을 지휘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돌격전에 그의 부하들에게, 만약 그가 쓰러진다면, 그를 짓밟고 적을 향해 돌격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1513년의 비첸차 전투에서, 1522년 4월 29일의 비코카 전투에 이르기까지, 그는 계속 스페인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프로스페로 콜로나의 부관이기 보다는 동료로 일했다.


[참고- Battle of Vicenza (혹은 Battle of La Motta) 1513 10 7- 비첸차 전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스키오에서 베네치아 공화국군과 스페인-신성로마제국군이 충돌한 것이고, 캉브레 동맹 전쟁의 주요전투 였다.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지휘하는 베네치아군이 라몬 데 카르도나와 페르난도 알바로스가 지휘하는 스페인-제국군에게 결정적으로 패했다.


Battle of Bicocca
비코카 전투 1522 4 27비코카 전투는 1522 4 27일의 싸움이었다. 로트렉이 지휘하는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이 프로스페로 콜로나가 지휘하는 스페인-제국-교황군에게 결정적으로 패했다. 로트렉은 롬바르디아로부터 철수했고, 밀라노를 제국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비코카 전투 이후, 카를5세가 콜로나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다발로스는 매우 실망했고, 그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황제가 있는 스페인의 바야돌리드로 여행을 떠났다. 그와 오랜 시간동안 비공개 대화를 나눈, 카를5세는 당분간만 콜로나를 상관으로 모시라고 설득했다. 이 회담에서 그는 카를5세의 신임을 얻었다. 그의 스페인 혈통과 충성심이 이탈리아인 보다는 이탈리아 주둔 스페인군의 지휘관으로 더 안전하다는 판단이었다.


1524년, 프랑스의 프랑수아1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때, 다발로스는 침공을 격퇴하기 위한 황제의 대리인이 되었다. 그의 입장은 매우 난처했다. 왜냐하면, 봉급을 제때 지급받지 못한, 군의 불만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발로스의 완고함,인내심,재치가 이 모든 난관들을 극복해냈다. 스페인 고참 병사들과 독일 용병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오랫동안의 파비아 공성전 동안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냈다.


1525년 2월 24일, 그는 뛰어난 공격으로, 프랑수아1세를 패배시키고, 포로로 잡았다. 다발로스의 계획은 그 대담성으로 빛났고, 그가 월등한 프랑스 중기병을 격파하는 데서 보여준 기술도 뛰어났고, 그는 화승총병과 경기병 혼성부대로 프랑스 중기병을 측면에서 공격하면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는 황제로부터 받은 대우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밀라노 공의 비서인 지롤라모 모로네 Girolamo Morone 가 그에게 접근해서, 프랑스,스페인,독일을 모두 이탈리아로부터 몰아내면, 그에게 왕위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다발로스는 유혹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충성파였다. 그는 카를5세에게 이를 알리고, 모로네는 투옥되었다.


부상 후유증으로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1525년 11월 4일 밀라노에서 사망했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의 칭호를 물려받은 것은 그의 사촌 알폰조 다발로스, 델 바스토 후작이었고, 그 역시도 뛰어난 제국 장군이었다. 그는 파비아 전투에서 제국군의 머스킷총병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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