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정치적 몰락 : 프랑스의 침공(2) 유럽외교사

이탈리아의 정치적 몰락 : 프랑스의 침공(1)

교황 율리오2세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는 보르자 가문의 강력한 적이었고, 교황 율리오2세 Julius II (1503-1513) 가 되었다. 그는 보르자를 탄압했고, 로마냐에서 새로 정복한 땅을 교황의 사법적 통제하에 두었다. 율리오2세가 "전사 교황"으로 알려진 것은 그가 르네상스 교황을 군사적 용맹과 외교적 술책의 정점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동맹 세력의 도움을 받아, 교황 율리오2세는 1509년 베네치아를 로마냐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이 지역에 대한 베네치아의 요구에 종지부를 찍었고, 이렇게 교황령 국가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장기적인 교황의 목표를 달성한 뒤, 율리오는 그의 교황직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과업 수행에 나섰다 :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침략자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율리오2세,아라곤의 페르난도,베네치아는 1511년 10월에 제2차 베네치아 동맹을 결성했고, 얼마지나지 않아 황제 막시밀리언1세와 스위스도 이에 가담했다. 1512년 동맹은 프랑스를 총퇴각 시켰고, 그들은 1513년 노바라에서 스위스군에게 참패했다.


하지만 프랑스도 끈질겼다. 그들은 루이의 후계자, 프랑수아1세(1515-1547) 치하에서, 세번째로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프랑스군은 1515년 9월 마링갸노 Maringnano 전투에서 스위스군을 대학살하면서, 노바라에서의 빚을 갚았다. 이번 승리로, 1516년 8월, 교황으로부터 볼로냐 협약 Concordat of Bologna 을 이끌어냈고, 이 타협으로 프랑스왕이 프랑스 성직자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게 되었고, 그 대신에, 프랑스는 교회공의회에서의 교황의 우위와 교황이 프랑스에서 성직취임세를 징수할 권리를 인정했다. 이것은 중요한 타협이었고,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이후에도 프랑스 가톨릭이 유지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로 프랑스가 새로 진입한 것이 16세기 초반의 스페인과의 4번의 전쟁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합스부르크-발루아 전쟁이었고, 프랑스는 어느 전쟁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외세의 침략기는 이탈리아의 수치가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라파엘로,미켄란젤로 등의 작품으로 이탈리아가 문화적 황금기를 맞이한 바로 그 때에, 이탈리아가 정치적 비극을 경험했던 것이었다. 프랑스,스페인,독일 군대가 자신의 조국을 황폐화 시키는 것을 목격한 것은 바로 마키아벨리 (1469-1527)였다. 그가 더많이 경험할 수록, 그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통일과 독립이 어떤 수단으로도 정당화되는 목표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인문주의자이자 고대 로마를 주의깊게 연구한 학자였던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인들이 "비르투 Virtu"라 불렀던, 고대 로마 통치자들의 정교하고 영웅적인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 고대 로마 시민들의 무한한 애국심과 자기 희생의 이야기들이 그의 관심사가 되었고, 그는 당대인들에게 이것이 결여되었다는 점에 대해 한탄했다. 고대 로마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낭만화가 고대와 현대 역사에 대한 그의 역사해석을 다소 과장되도록 만들었다. 그의 피렌체 동료였던, 프란체스코 구이치아르디니 (1483-1540)는 고대를 상대적으로 덜 이상화했고, 더 진실에 가까운,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역사를 저술했다.

고대 로마와 높은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는 당대의 로마를 병치시키면서, 그는 오늘날 마키아벨리주의자라고 알려진, 유명한 냉소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일구이언,테러에 능한, 비도덕적인 강력한 사람만이 매우 분열되고, 이기적인 국민에게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이탈리아의 부활을 위해서는 파렴치한 독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문자그대로 전제정을 옹호한 것은 그의 초기 저작과 공화국을 위해 봉사했던 그의 강력한 가문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가 군주에게 사기와 잔인성의 장점을 발견하라고 조언했을 때, 진지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는 메디치 가문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원했고, 메디치가는 레오10세(1513-1521)의 임기 동안, 교황청 국가를 장악했다. 동시에,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라는 강력한 영토 국가의 통제권을 다시 장악했다. 마치 마키아벨리의 영웅, 체사레 보르자와 그의 아버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로마냐에서 그랬듯이 말이었다. 군주론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되었다.


마키아벨리의 바람이 어떤 것이었던지 간에, 메디치 가문이 이탈리아의 구세주가 되지 못했다. 두번째 메디치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1523-1534)는 1527년에 카를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았고, 바로 그해에 마키아벨리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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