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가 용병제도를 비난한 이유는? (끝) 유럽외교사

마키아벨리가 용병제도를 비난한 이유는? (2)

마찬가지로, 마키아벨리는 전쟁의 활력이 돈을 버는데 있다는 일반적 통념을 비난했다. 용병대장 지안 지아코모 트리불지오 Gian Giacomo Trivulzio 는 이렇게 주장했다 :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세가지가 필요하다 : 돈, 돈, 돈" 실제로, 용병의 전쟁은 적을 격파하는 것이기 보다는 경제적으로 질식시키는 것이었다. 장기간의 도시 포위전 후에, 승리를 쟁취하기 보다는 휴전 협상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의 <피렌체 역사>에서,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는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하는 전쟁 "guerres en dentelle" 을 비웃었다. 가령, 안기아리 전투 la bataille d'Anghiari 에서, "한 명도 죽지 않았고, 부상자도 명예로운 충격을 받은 자도 없었던 것은 말에서 내려서, 제자리에서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반대로, 전투 작전이란, "짧고 굵은"- 충격적이고, 대규모여야만 했다. 피렌체의 관리는 힘으로 결정적인 충격을 주는 것 이외의 다른 전쟁을 상상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점에서, 최초의 전체전 la guerre totale 이론가였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를 위한 신병기인 포병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 놀랄 수도 있다. 대포는 전투 초반에 소음을 내기위해서 사용되었다. 최선의 경우, 대포는 보병에게 겁을 주었다. 포탄이 그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보병은 허리를 구부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같은 그의 단순한 생각이 확실한 조롱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그가 군사적으로 무능하다는 명성을 많이 확인시켜준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만 포병의 역할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가장 저열한 보병이 가장 고귀한 기병을 이길 수 있게 만든 대포가 아직 파멸적인 무기로 간주되지 않았다. 1524년, 바야르 Bayard가 소총에 맞아 죽었다 : 대학살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아리오스트 Arioste 는 1532년 그의 <격노한 롤랑 Roland Furieux>에서, 대포보다는 소총이 더 현대적인 무기라고 주장했다.


만약 마키아벨리가 대포를 경멸했고, 이 무기를 위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이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대포가 기술자의 군대를 발전시킬 것이라 우려했고, 이같은 군대는 무장한 국민 la nation en armes 이라는 그의 시민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가 옳았다 : 대포 혁명이 16세기에 군의 전문화를 촉발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유럽에서 군사 기술자의 경쟁력과 창의성으로 명성이 있었던, 이탈리아가 이같은 변화를 이끌었다.


"군사 인문주의"의 선구자였던, 마키아벨리는 그의 <전략론>에서 전술 상황판을 처음으로 제안했고, 지휘 활동에서 상황판의 역할을 강조했다 : "지휘관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부대가 전진하는 모든 촌락을 묘사하고 그리는 것이고, 지형,주민의 수,거리,길,산,강,늪 그리고 이들의 모든 상태를 숙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주된 공헌은 다른데 있었다. 그에게, 전쟁은 정치 처럼, 기술이었다. 그는 군주에게 그것을 수행하는 법을 조언했다. 그의 사상은 급진적으로, 결정적으로, 전쟁과 법칙, 전쟁과 정치권력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군사 용어가 그의 군주론에서 자주 사용된 이유는, "신중한 군주는 전쟁,전쟁 기구,전쟁 과학 이외의 다른 관심, 다른 생각을 가져는 안된다"였기 때문이었다. 마키아벨리에게, 평화시에 통치하는 것과 전쟁시에 지휘하는 것은 하나였고, 같은 것이었다.


전쟁을 정치의 핵심으로 간주한다면,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책임있는 군주에게, 전체적으로 정치란, 전쟁 기술을 모범으로 삼아 실천하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란, 때로 폭력적이고 때로 평화스러운, 지배 기술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만약 마키아벨리 철학이 통치술이고,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정치적 군사적 맥락속에서 이해가능한 것이라면, 동시에, 그의 철학은 새로운 원칙에 기반한 것이었고, 강력한 군주 국가에서만 실제로 실천가능한 것이었다. 클라우제비츠가 이것이 군사분야에서 마키아벨리의 가장 본질적인 판단이라고 극찬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난세의 한가운데에서, 마키아벨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더러운" 전쟁 ,즉 전체전, 정치적 전쟁을 주장한 최초의 이론가였다. 그의 사상이 여전히 불편한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 이같은 폭력적인, 지배 이론을 좋아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랴? 부정에도 불구하고, 한세기 후에, 전쟁의 면모가 완전히 변했고, 이는 국가의 면모가 동시에 변했기 때문이었다.      




덧글

  • 앨런비 2012/07/30 14:39 # 답글

    뭐랄까.
    마키아벨리 쉴드질이 지나쳐서 까야할 것도 쉴드하는 글이군요 ㄱ-
    어차피 번역글이니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마키아벨리의 군사적 식견(?)은 있는가도 모르겠지만 최악입니다. 본문에서 나온 대포의 경우는 100년전쟁 후반이나 이탈리아 전쟁이나 아주 잘만 쓰였던 병기고. 다들 대포의 힘을 무시했던 것이 아닌, 군사적 능력이 없던 인문주의자들이 환상에 빠져서 단체로 대포를 무시했던 것이 더 맞겠죠.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왜곡질도 해서 문제입니다. 대표적으로 본문에 나온 안기아리 전투가 되겠는데. 안기아리 전투가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사상자도 없는 그런 전투가 아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ㄱ- 글고 그렇게 욕하는 콘도티에리들도 싸울 때는 잘만 싸웠고요. 특히 베네치아는 똑같은 콘도티에리 굴리면서 운영방식만 바꾼 결과 캉브레 동맹전쟁에서 유럽 전체와 맞짱을 뜨고 버텨내죠.
    여튼 결론적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사적 식견은 거시적인 것 빼고는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안습한 수준입니다. 그 예는 위에서 적은 것으로 끝나지도 않고요. 대략 큰 범위의 개념으로 본다면, 특히 정치-외교의 연결에서 보면 중요한데, 실제 적용은 심하게 말하면 개념없는 망상가라고 해도 될 정도고요.
  • 파리13구 2012/07/30 14:59 #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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