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가 용병제도를 비난한 이유는? (2) 유럽외교사

마키아벨리가 용병제도를 비난한 이유는? (1)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까? 13세기말 이탈리아에서, 지역공동체 제도의 위기가 민병대 원칙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즉 도시와 그 외곽지역의 남성들로 구성된 시민군에 대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규적인 재정의 결여로, 상비군을 돈을 주고 고용할 수 없었던, 이탈리아 도시들은 용병대장이 지휘하는 용병에 의존했다.


급료가 제때에 지불되지 않거나, 계약이 만료되면, 경매에 나온 매물과 같았던, 용병대장들은 자주 주인을 바꾸었다. 이 제도가 이탈리아 정치 놀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인문주의자들은 용병제를 가혹하게 비판했고, 그것으로 인해 시민정신이 파괴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땅에서 복무한 첫 용병대를 지휘한 것은 프랑스인 장수 혹은 존 호크우드 같은 영국인 장수였으고, 그들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전념하기 위해서, 100년전쟁의 정전을 이용했다.


1380년대에 모든 것이 변했다 : 이탈리아 용병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초기 용병대장들 중 한 명인 알베리코 다 바르비아노Alberico da Barbiano는 로마의 영세 귀족으로, 1379년에 로마 부근, 마리노에서 용맹성과 잔인함으로 유명한, 부르타뉴 군대를 패배시켰다.


새로운 류의 인간이었다는 전설과는 달리, 대부분의 이탈리아의 위대한 용병대장들은 귀족 혈통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주 도시화가 덜 진행된 농촌 지역 출신이었고, 농업위기의 충격이 강타한 지방 출신들이 많았다 : 로마 인근, 마르세스,아브루제스,카라브레


많은 용병대장들이 자신이 행사하는 힘이 강해지면서, 지역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인, 15세기 후반 동안의 가장 위대한 군주들은 과거 용병대장 출신이었다 : 가령, 밀라노의 스포르차,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 망투에의 곤자구에 등. 사치스런 후원자이자 신중한 통치자였던, 이 군주들은 1320-1380년대의 용병대장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이같은 정치적 성공이 이탈리아인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군사적 우월성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프랑스 기병의 비효율성을 비웃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가령 피렌체의 연대기 작가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1418년 그의 책, <데 밀리타>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프랑스 왕의 국민군의 효율성을 이탈리아 용병의 준비 부족과 대비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최근의 연구들이 이 해석에 도전하고 있다. 즉 프랑스 왕도 용병에 의존했으며, 계약을 통한 모병이 중세말까지 도처에서 일반적이었다는 것이다. 1448년 샤를7세의 궁수 징병부터 1534년 프랑수아1세의 지방의 임시모병 보병연대에 이르기 까지, 국민 보병을 창설하려는 프랑스 국왕의 노력은 항상 제한적인 효과만을 가졌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탈리아 국가들, 특히 밀라노 공국은 용병부대를 통제하고 훈련시키는 절차를 발전시켜서, 이를 상비군에 근접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마리아 나디아 코비니의 지적처럼, 이탈리아가 1494년부터 대적한 세력은 다음과 같았다 : "이탈리아 군대와는 그다지 다르지 않지만, 더 강력한 국가일 뿐만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이 국가들이 길고 힘든 전쟁을 견딜 수 있었고, 강력하고, 결의에 찬 왕조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1494년의 위기는 따라서 군사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이었다. 그리고 용병제도에 대한 마키아벨리주의의 비판이 근본적으로 군사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스위스인들은 현대전의 주역이었다. 밀라노의 스위스 동맹군은 프랑스군을 롬바르디에서 쫒아내는데 성공하면서, 이탈리아 정치 상황의 심판이 되었다.


스위스군에 대해서, 마키아벨리가 가장 존경했던 것은 농민군의 결속이었고, 이는 지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응집이었다.


그렇다면, 왜 피렌체 민병대는 1512년 플라토에서 스페인군에 맞서 패배한 반면,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농민과 수공업자들은 같은 적으로부터 베네치아 땅을 지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구이치아르디니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평민들이 베네치아를 위한, 믿을 수 없는 애정으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따라서, 무장한 시민의 통일체와 시민들이 지키고 보존해야 할 정치권력간의 애정적 관계 덕분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모든 전략적 선택은 -가장 유효할 뿐만아니라 가장 논쟁적인- 군사문제에 관한,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개념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중기병이 돌격하는 전투에 적합한, 용병제도라는 현실에 맞서서, 마키아벨리는 보병의 우위를 옹호했다. 장-루이 푸르넬과 장-클로드 장카리니의 지적처럼, 전술적 판단을 넘어, "보병은 무장한 공화국이라는 정치 계획의 핵심이었다"  




덧글

  • 앨런비 2012/07/28 19:05 # 답글

    18~19세기 군대에서 비르투스가 중요하게 작용하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가 없죠. 용병과 시민군 문제는 근본적으로 전쟁의 규모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용병을 고용하는 것보다 시민군을 징집하는 것으 더 싸게 먹히니까요. 다만 거기서 비르투스가 시민군의 전투력을 올리는데 한 요인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용병의 전투력은 일반적으로 시민군 이상이었습니다. 다만 쪽수가 결정적인 문제죠. 16세기 초강대국 스페인도 5만명까진 헉헉대며 버텼지만 20만이 되자 연이어 파산을 합니다. 하지만 다른 동네들도 전쟁을 대규모로 하니 값싸게 쪽수를 늘리는 방식인 징집제로 갈 수 밖에 없던 것이죠.
  • 파리13구 2012/07/29 06:27 #

    네. 지적에 감사합니다. ^^
  • 零丁洋 2012/07/29 00:02 # 답글

    시민군은 민주정과 관련있죠. 어떤 군주도 시민들에게 무기를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죠. 시민군은 용병 보다 숙련도는 떨어지나 정신력이 앞서죠. 시민군 즉 국민군대로 유럽의 전선을 누빈 나폴레옹에서 보듯 전투에서 도덕성 즉 정신이 중요함을 알 수 있죠.
  • 파리13구 2012/07/29 06:28 #

    그렇습니다.
  • 행인1 2012/07/29 09:22 # 답글

    사실 정치와 군사를 때어놓고 생각하기는 어렵죠.
  • 파리13구 2012/07/29 10:17 #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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