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가 용병제도를 비난한 이유는? (1) 유럽외교사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외교 (1)

마키아벨리와 용병의 종말


프랑스 파리 - 월간 <역사>


2002년 6월 27일


파트릭 부슈롱 Patrick Boucheron


1494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것은 위대한 국가 사상가, 마키아벨리에게 충격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약점은 용병부대에 대한 의존으로 설명되었다. 해법이란? : 시민의,국민의 군대와 상비군을 창설하는 것!


1526년 1월 3일, 마키아벨리는 그의 친구이자,인문주의자,역사가 그리고 피렌체 정치인이었던 Francesco Guicciardini 프란체스코 구이치아르디니 (1483-1540)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 "항상, 내 기억을 멀리 되집어 보노라면, 우리는 전쟁을 했거나, 그것에 대해 말했다." 1469년 피렌체에서 태어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실제로 끊임없는 전쟁 상태를 경험하게 되고, 그가 사망한 1527년에는 카를5세의 제국 군대가 로마를 약탈했다.


이 전쟁은 우선, 이탈리아 국가들이 각각의 용병대장들에게 위임한 것이었다. 이들 용병대장들은 용병부대의 지휘관으로, 실제로 전쟁을 주도했고, 그들은 자신의 책략과 배신을 통해, 국내 갈등으로부터 이익을 보았다.


그리고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 프랑스 왕 샤를8세가 1494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다. 구이치아르디니는 다음과 같은 1494년의 사건 서술로 그의 책 <이탈리아 역사>를 시작했다 : "이 화염과 파괴적인 사건은 국가들을 바꿨을 뿐만아니라, 국가를 통치하는 방법과 전쟁을 하는 방법까지도 바꿔 놓았다."


이후 역사가들이 "이탈리아 전쟁"이라 부르게 될 사건이 이탈리아 국가들의 정치체제를 사실상 위태롭게 만들었다. 또한 이 사건은 인문주의자들의 강렬한 사유 작업에게 작업을 주었고, 그들은 문화 방면으로 너무도 위대한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왜 이렇게 약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를 원했다.


마키아벨리는 재앙에 대한 이같은 사유를 가장 극한까지 추진한 사람이었다. 즉 1494년의 충격파가 그의 책에서, 권력 운용에 관한 모든 범주의 중세적 사고를 무력화시키는, 이론적 타격을 주었다. 이렇게 근대적 정치 이성이 완전 무장한 상태로 이 책에서 탄생했다.


국가 사상가였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전쟁 이론가가 되기 원했다. 그는 1513년의 군주론, 1513-1519년의 로마사 논고 그리고 특유의 문체로 1521년에 그의 생존 중에 간행된 유일한 책인 1512-1519년의 전략론에서, 군 운용과 국가 관리 간의 관계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티투스 리비우스, 폴리비우스 그리고 베제티우스 같은 고대 작가들의 애독자였던,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이론에, 인문주의적 톤과 형식을 주었다 : 피렌체 궁 정원에서 용병대장, 파르리지오 콜로나가 젊은 귀족과 함께, 고대 전략에 관한 유쾌한 논쟁을 나누며, 자신들의 모델에 따라 전쟁 지휘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1557년부터 스스로 이탈리아 전쟁에서 싸운, 프랑스 회상록 작가, 브랑톰 Brantôme 에 따르면, 이 명백한 건방짐이 마키아벨리가 "공허한 교육자"라는 그의 사후 명성을 강화시켰다고 한다. 이 피렌체의 군사 전략가는 끈질긴 전설로 인해 오랫동안 비난받아 왔다 : 즉 마키아벨리의 전략이란 탁상공론에 불과하며, 실제로 군 지휘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16세기 소설가 마테오 반델로가 지어낸 것으로, 현대까지도 반마키아벨리파가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이상으로 잘못된 주장은 없을 것이다 : 마키아벨리는 우선, 자신의 개인적 지휘 경험을 토대로 전략을 발전시켰다. 1500년, 이미 정치 행정관이었던 마키아벨리는 피사의 성벽 앞에서, 피렌체를 위해 봉사하는 가스코뉴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무기력하게 목격했다. 그리고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 곁에서의 외교 활동을 통해, 프랑스군의 구조를 연구할 기회를 얻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이같은 관찰이 그의 개인적인 솔선행위에 영감을 주었다 : 1505년 12월부터 1506년 2월까지, 마키아벨리는 보병 모집을 위해 피렌체 교외 지역을 방문했다. 그의 민병대는 17세에서 40세에 이르는,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남성을 모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결정적인 군사적 성공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그의 결정은 피렌체 엘리트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그들은 농민을 무장한다는 생각이 말도 안된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가 시민군이라는 새롭고,불순한 생각을 옹호했다는 것은 그를 근대 전쟁의 이론가로 만들었다.


그의 친구, 프란체스코 베톨리 Francesco Vettori 는 1513년에 "최상의 군대는 주민으로 구성된 군대다"라고 주장했다. 평생동안 마키아벨리도 용병제를 끊임없이 비난했다. 그의 친구가 자신의 판단을 옹호하기 위해서 고대의 역사를 예로 삼았다면, 마키아벨리는 무엇보다도 당시의 경험 때문에, 용병제도를 비난했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군에 의해서, 이탈리아 국가들이 붕괴한 것의 책임이 용병에게 있었다. 이렇게 <군주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 "이탈리아가 폐허가 된 유일한 원인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용병에 완전히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그만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 16세기 군사 서술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바란, 이탈리아의 패배를 상비군의 부재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전쟁은 따라서 두 시대에 속하는 군대의 충돌이었다. 시대착오적이고, 무기력한 용병 시대의 군대와 상시적 재정에 의해서 자금을 조달받는 국민의 군대간의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덧글

  • 행인1 2012/07/29 09:18 # 답글

    그런데 당시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스군도 태반은 '용병'이었을텐데....;;;
  • 파리13구 2012/07/29 10:17 #

    마키아벨리는 프랑수아1세 군대의 지방의 임시모병 보병연대를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 터미베어 2012/07/29 15:24 # 답글

    프랑스군만 아니라 당시 '왕'들의 군사중 상당후는 용병아니었던가요.....
    그나저나 마키아벨리가 군사 지휘 경험(그러니 실전경험)이 있던가요 ㄱ-?
  • 파리13구 2012/07/30 07:12 #

    위의 글에서 보신대로 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6 대표이글루

2015 대표이글루

2013 대표이글루

2011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방문자

광고

2018 대표이글루_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