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유럽의 국제관계 (2) 유럽외교사

16세기 유럽의 국제관계 (1)

<프랑수아1세>


합스부르크-오스만 갈등


합스부르크와 오스만간의 갈등도 돌이킬 수 없었다. 14세기 중반 이래, 유럽은 오스만 터키의 국력 상승을 공포와 불안을 가지고, 수동적으로 관망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터키는 아드리아 해안을 포함, 도나우강 남부의, 동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동방의 마지막 제노바 식민지들을 굴복시켰고, 베니스 제국의 많은 부분을 빼앗았다. 활기있는 무역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부 지중해에서 오랫동안 누려왔던, 옛 무역 독점이 파괴되었다. 너무 눈부시게 서쪽 대양을 향해 팽창을 했던, 기독교세계는 동방의 무슬림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었다. 술레이만 대제(통치 1520-1566)의 통치 동안, 합스부르크의 영토들은 터키 공격의 예봉에 시달렸고, 도나우강까지 진출한 오스만은 유럽 국가체제의 내부 일원이 되었다. 슐레이만은 1521년에 베오그라드를 차지했다. 1526년 8월, 그는 모하치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했다.


술레이만은 빈 Vienna 도 압박했다. 1529년 9월, 그는 빈의 성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의 도래와 통신선이 지나치게 길어진 관계로, 그의 군대는 퇴각해야만 했다. 빈은 함락을 면했다.하지만 얼마동안 터키는 합스부르크 세력의 전통적인 중심지를 위협했다. 불가피하게도, 카를5세와 보헤미와왕 페르디난드는 그들의 상속지 방어를 이교도에 대항한 유럽의 방어로 포장했고, 그들이 잃어버린 헝가리를 탈환하기로한 결정을 십자군으로 선전했고, 이를 위해서 그들은 유럽 전역으로부터 인력과 자금을 요청했다.

카를은 1531년에 반격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십자군 탐사를 계속했고, 튀니스를 장악했고, 서부 지중해에서 새로운 전선을 열었고, 수년 후인 1571년에 그 정점에 달하게 되는 원정을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돈 존 Don John이 레판토에서 터키 지중해 함대를 격파한 것이 될 것이었다. (레판토 해전-1571년)


합스부르크와 발루아 그리고 합스부르크와 오스만이 힘의 대결을 펼치는 가운데, 힘의 논리에 따라 동맹이 발전했다. 종교적 열정과 교리적 엄격함이 강력했던 시대에, 동맹의 동기는 매우 세속적이었다. 3대 경쟁 세력들 중 하나가 무슬림이었지만,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동맹은 프랑스의 가장 기독교적인 왕과 이교도 술탄이 맺은, 공동의 적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에 맞서는 동맹이었다. 파비아 전투(1525년 2월 24일)에서 패전, 마드리드의 포로가 되었던, 프랑스의 프랑수아1세는 술탄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요청했다. 모하치 전투는 파비아 전투에 대항 응전이었고, 스페인의 우위에 맞서 프랑스를 지원하겠다는 술탄의 약속이 지켜진 것이었다. 당대인들은 이것을 "불경한 동맹"이라 비난했지만, 십자군적인 열정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마지막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미 15세기에, 베니스인들은 나폴리왕국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터키에게 브린디시와 오트란토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심지어 교황도 반란을 도모한 술탄의 동생을 억류해주는 조건으로, 터키의 자금을 받았다.


두 기독교 경쟁국들은 가톨릭이었다. 그들은 쉼없이 싸웠고, 더 작은 국가들은 그들이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이든 여부에 상관없이, 종교적 교리 보다는 힘의 논리에 따라 합종연횡했다. 이탈리아인들은 강자에 맞서, 약자와 동맹했고, 반도로부터 합스부르크와 발루아 모두를 축출시키기를 원했다. 독일 제후들의 목표도,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이든, 황제를 약하게 만들기를 원했고, 그들은 독일에서 황제권이 강화되는 시도에 맞서서, 재빠르게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이에 대응했다.


파비아 전투 이후, 카를5세가 북부와 남부 이탈리아를 모두 장악했다. 따라서 교황은 프랑스와 동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의 결과로 16세기 중반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합종연횡의 형태가 드러났고, 이는 가톨릭에게는 재앙적인 것이었던, 교리가 아닌, 힘의 논리에 따르는 국제관계였다. 한편으로는 카를5세의 제국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터키와 동맹한 프랑스,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이 있었다.


재정적인 난관으로 인해서 평화와 카토-캉브레지 조약 (1559년 4월)으로 귀결되었다. 경쟁 당사자들인 프랑스의 앙리2세와 스페인의 펠리페2세가 앞으로 명백한 것이 될 것을 인정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정복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고, 밀라노와 나폴리에 대한 요구를 철회했다. 장기간의 투쟁 끝에, 이탈리아 반도의 주인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되었다. 스페인 총독이 시실리,나폴리,밀리노 공국을 통치했다. 토스카니 대공국과 교황령 국가는 스페인의 위성국가들이 되었다. 다만, 베니스만이 제한적인 행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 합스부르크는 프랑스를 해체시킬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는 점을 인정했다. 프랑스는 매우 잘 조직되어 있었고, 인력이 풍부했고, 매우 전략적으로 위치해 있었다. 스페인의 펠리페2세는 프랑스 부르고뉴에 대한 요구를 철회했다.


별도의 조약을 통해서, 대륙에서 유일하게 남은 영국땅인 칼레가 프랑스에게 반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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