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모로코위기와 슐리펜의 사임? " 유럽외교사

[유럽외교사]
[러일전쟁][영불협상][제1차 모로코위기]
[슐리펜 계획]


우선, 제1차 모로코 위기란 무엇인가?


영문 위키페디아 관련 항목을 번역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관련 사건 연표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시작. 선전포고(2월 10일)에 앞서, 일본은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기습공격했다.

4월 8일, 영불협상 The Entente Cordiale - 영국과 프랑스간의 영불협상이 조인되었다.


1905년

3월 31일, 제1차 모로코위기 - 독일 카이저 빌헬름2세가 모로코 탕헤르를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요트에서 모로코의 독립과 주권국가임을 선포했다.


제1차 모로코 위기는 모로코의 문제에 대해서, 1905년 3월부터 1906년 5월까지 진행된 국제적 위기였다. 독일은 모로코 독립 문제를 이용, 모로코에서의 독일의 상업적 이익을 증진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간의 균열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모로코 위기를 도발했다. 독일은 모로코 독립 보장이라는 명분상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 관련 국제회의에서 독일의 입장에 대한 외교적 지원을 얻어내는데는 실패했다. 위기로 독일의 프랑스와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영불협상이 성공하는데 일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배경


독일 총리 베른하르트 폰 뷜로 Bernhard von Bülow 는 최근에 영국과 프랑스간에 조인된 영불협상 Entente Cordiale (1904년 4월 8일)을 독일을 잠재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동맹으로 간주하면서 우려했다. 영불협상 이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아시아,태평양 등지에서 식민지 경쟁으로 갈등 중이었다. 폰 뷜로는 독일이 작은 위기를 도발해서, 영불간의 동맹의 한계를 드러내서, 영국이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프랑스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면, 영불협상의 균열 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모로코를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고, 이를 위한 외교적 지지를 위해서, 1904년 4월 8일에 영국과 1904년 10월 7일에 스페인과 상호조약을 체결했다. 이탈리아와의 이전의 합의 (1900년 12월 14-16일)는 아직 조인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카이저의 방문


1905년 3월 31일, 독일 카이저 빌헬름2세가 모로코의 탕헤르에 상륙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카이저는 모로코 술탄의 주권을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이 선언은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에 대한 위협적 도전에 다름아니었다. 이어서 술탄은 프랑스가 제안했던 정부 개혁을 거절했고, 모로코에 필요한 개혁이 무엇인지 결정하기 위한, 강대국들이 참여하는 국제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프랑스의 대응; 전시 동원령


독일은 많은 국가들이 참여하는 국제회의를 통해서, 프랑스가 다른 유럽 강대국들에게 심판을 받게 만들기를 원했다. 이에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가 완강히 반대했고, 이같은 회의가 개최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폰 뷜로 총리는 이 문제 때문에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위기는 6월 중순에 절정을 맞이했다. 프랑스가 6월 15일 전군의 휴가를 취소했고, 독일은 6월 22일에 술탄과 방어 동맹을 체결하겠다고 프랑스를 위협했다. 프랑스 총리, 모리스 루비에 Maurice Rouvier 는 이 문제로 독일과 전쟁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델카세 외무장관이 사임했고, 프랑스 정부가 델카세의 강경론을 포기했다. 7월 1일, 프랑스는 국제회의 참가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헤시라스 회의 개최 이전까지, 위기가 계속되었다. 독일은 12월 20일, 예비군을 소집했고, 프랑스는 1906년 1월 3일 독일 국경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알헤시라스 회의


알헤시라스 회의는 1906년 1월 16일부터 4월 7일까지, 모로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린 회의였다. 13국이 참가했지만, 독일은 자신을 지지하는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일은 타협을 시도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이를 거부했다. 프랑스는 영국,러시아,이탈리아,스페인,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역자주- 미국이 프랑스를 지지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시오 - 제목 : 리슐리외의 국가이성이 적용된 사례들은? 주소- http://kk1234ang.egloos.com/2840785]


독일은 체면을 살리기 위한 타협적인 합의를 수용하기로 결정되었고, 1906년 5월 31일에 조인되었다. 합의에 따라, 프랑스는 모로코 경찰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했지만, 모로코의 정치,재정 문제에 대한 통제권은 유지하게 되었다.


영향


알헤시라스 회의로 제1차 모로코 위기가 일시적으로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3국동맹과 3국협상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것이 제1차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다.


제1차 모로코 위기로, 영불협상이 영국이 위기시에도 프랑스를 지원해 줄 만큼 강하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이번 위기로 1년 후에 영러협상이 조인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영러 양국은 모로코 위기에서 프랑스를 같이 지원했던 것이다.


카이저 빌헬름2세는 모욕을 당해서 화가났고, 다시는 굴복하지 않기로 결심, 이것이 제2차 모로코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 아니카 몸바우어의 <헬무트 몰트케와 제1차세계대전의 기원>에 따르면, 모로코 위기시에 독일의 슐리펜 참모총장은 프랑스에 대한 예방 전쟁을 주장했고, 이 문제로 카이저 및 총리에 대립하면서, 사임하게 되었고, 소 몰트케가 후임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모로코 위기 이전에, 독일 외무부 정치국장, 프리드리히 홀슈타인과 독일군 참모총장 슐리펜이 모로코 위기를 프랑스에 대한 예방 전쟁을 위한 구실로 삼기로 사실의 합의를 보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1905년 3월 빌헬름2세가 모로코의 항구 탄지에르를 방문한 것은 홀슈타인의 강력한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홀슈타인이 카이저의 탄지에르 방문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것은 당시의 시점이 프랑스에 대한 예방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절호의 시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 한다. 영국은 보어 전쟁의 후유증으로 지쳐있었고, 러시아는 러일전쟁 중이었다. 따라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프랑스는 고립된 상태에서 독일과 대적할 것이었다. 홀슈타인은 1909년 친구 란켄 Lanken 에게 독일 협공하는 포위망을 깨기위해서 카이저가 탄지에르를 방문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슐리펜이 폰 뷜로 총리에게 전쟁을 위한 상황이 독일에게 유리하다고 강조했다는 점이라 한다.


슐리펜의 사위, 빌헬름 폰 한케 Wilhelm von Hahnke 는 전후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 독일의 함대 건설 결심이 명확한 이상, 머지않아 영국과의 충돌이 확실했다. 따라서 독일 슐리펜 참모총장은 영국이 독일의 적을 공개적으로 지원하기 전에,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프랑스와 대결을 미리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상황에서, 프랑스의 동맹국 러시아가 극동에서의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있었고, 프랑스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프랑스에 대한 예방전쟁을 위한 절호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슐리펜이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러일전쟁,영불협상,모로코 위기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슐리펜은 프랑스에 대한 예방전쟁을 주장했고, 이 문제에 관한 대립으로 슐리펜이 사임했다는 것이다.

1906년 1월 1일 슐리펜 참모총장이 사임하고, 후임으로 헬무트 폰 몰트케가 임명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는 것이다.




덧글

  • 일화 2012/05/09 17:34 # 답글

    확실히 1914년보다는 이때가 더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독일이 예방전쟁을 포기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혹시 영독동맹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인가요?
  • 파리13구 2012/05/10 12:14 #

    글쎄요, 한번 고민해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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