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이 유럽에 준 영향은?" (2) 유럽외교사

"러일전쟁이 유럽에 준 영향은?" (1)

[러일전쟁]
[러시아 외교정책]
[제1차세계대전]


"러일전쟁이 유럽에 준 영향은?" (2)


러일전쟁은 러시아 외교 및 군사 정책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매튜 셀리그먼 MATTHEW S. SELIGMANN 의 <독일,러일전쟁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으로의 과정 Germany,the Russo-Japanese War, and the road to the Great War>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외교적 관점에서, 극동에서의 영향력 확대과정에서 굴욕을 당한 러시아는 동아시아로 팽창에 대한 열정을 잃었고, 다른 지역, 특히 유럽으로 관심을 다시 되돌리게 되었다. 따라서, 1905년 이후, 발칸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베를린에게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었고, 발칸에서의 러시아의 관심증가가 러시아를 독일의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충돌로 이끌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지역의 불안과 러시아-독일 관계의 악화로 귀결될 것이 분명했다. 발칸에서 위기가 거듭되자, 오스트리아-러시아 관계만을 악화시킨 것이 아니라, 러시아-독일의 친선 가능성을 제거했고, 심지어 양국관계의 악화가 불가피하는 전망을 지배적이게 만들기까지 했다.


만약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무기력한 상태로 남아있었다면, 양국간의 관계 악화가 베를린을 덜 긴장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1905년 슐리펜의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 직후의 러시아의 약점은 단기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많은 전문가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짜르의 러시아가 극동에서의 패전 이후 매우 빠르게 군사적으로 회복하고 있었다는 현실에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군사적 약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를 위해서, 러시아 군당국은 개혁에 착수했다. 그들은 무능한 장교들을 추방시키고, 젊고 유능한 장교들을 새로 선발했다. 그들은 군대 훈련 과정을 개혁했고, 현대 무기로 군을 재무장시켰고, 특수 부대를 증설했고,비행기 같은 새로운 기술을 실험했다. 독일과 같은 인접국가들의 선제 공격에 취약한 국경 방어에 투입될 수 있는 훈련이 실시되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의 동원속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들이 모색되었고, 군대를 보다 빨리 전선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철도가 건설되었다.


이같은 군사 개혁의 결과는 극적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굴욕을 당했던 러시아군이 베를린의 시각에서 볼 때, 최고의 군대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사 개혁을 통한 군사력 증강을 바탕으로,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자신감이 점점 회복되어 갔다. 가령, 1914년 1월, 러시아의 니콜라이2세가 프랑스의 델카세에게, 러시아-독일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독일의 야망과 러시아의 이해가 아마도 불가피하게도 곧 충돌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난 극동에서의 전쟁에서 처럼, 그들이 우리를 밟아서 뭉개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 국민감정이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이렇게, 러시아의 자신감이 상승 중이었던 반면에, 독일 지도자들의 자신감은 하락세에 있었다. 특히, 독일의 군전략가들은 러시아의 군사 개혁으로 1905년의 독일의 군사전략적 이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슐리펜 계획과 같은, 독일군의 주력을 서쪽에 일방적으로 배치한다는 전략은 러시아의 약점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러시아가 더이상 1905년처럼 약하지 않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슐리펜 계획이 더이상 확실한 군사전략이 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독일을 불안하게 만든 것은 러시아의 전략 철도망 건설이었고, 철도망의 완성으로 엄청난 병력이 일정한 시간내에 독일-러시아 국경으로 배치되는 것이 가능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독일의 몰트케 참모총장이 1914년 7월에 베트만 총리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조만간 러시아가 13일만에 병력의 2/3를 독일 국경에 배치하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다." 이같은 러시아군의 빠른 배치에 직면해서, 동 프로이센의 소규모 방어군은 러시아군에게 압도당할 것이고, 독일 자체의 운명이 위태롭게 될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그렇다면, 이같은 난관에 대한 독일의 군사적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첫번째 대안은 슐리펜의 공격적 계획을 포기하고, 새로운 상황에 맞게 군사전략을 수정하는 것이 었지만, 진지하게 고민되지 못했다. 다른 대안은 러시아의 철도건설이 완공되기 이전에, 예방 전쟁 "precentive war" 을 치르는 것이었다. 몰트케가 선호했던 것은 바로 후자였다.


1914년 여름,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되고, 발칸에서 새로운 위기가 발생했을 때, 몰트케는 이번의 절호의 기회를 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1914년 8월, 1905년에 러시아가 패전의 수렁으로 매우 약했을 때 고안된 슐리펜 계획이, 러시아의 군사력 상승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몰트케에 의해서 약간 수정된 상태로 실천되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슐리펜 계획을 매개로, 러일전쟁과 제1차세계대전의 역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덧글

  • 일화 2012/04/27 16:10 # 답글

    파리13구님 덕분에 1차대전의 발발원인에 대한 이해도가 확 깊어졌습니다. ^^
  • 파리13구 2012/04/27 16:11 #

    감사합니다. ^^
  • 이네스 2012/04/27 18:48 # 답글

    이렇게 사건이 읽힐수있군요. 감사히 보고갑니다!
  • 파리13구 2012/04/27 18:56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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