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이 유럽에 준 영향은?" (1) 유럽외교사

"러일전쟁이 슐리펜에게 준 영향은?"

[러일전쟁]
[세력균형]


"러일전쟁이 유럽에 준 영향은?" (1)


로템 코우너 Rotem Kowner 의 <식민지 충돌과 제0차 세계대전 : 세계적 관점에서 본, 러일전쟁의 영향> a colonial clash and World War Zero: the impact of the Russo-Japanese War in a global perspective 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러일전쟁의 유럽에 대한 암시 : 세력균형의 파괴


러일전쟁이 유럽에 즉각적이거나 가시적인 변동을 유발한 것인 아니었지만, 그것이 유럽대륙에 준 궁극적인 영향은 파괴적인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유럽에 준 영향은 만주 전장에서의 러시아의 참패와 1905년 혁명 전야의 러시아 국내불안과 관련이 있다. 그 결과 새로운 세력균형 혹은 세력균형의 재편이 등장했다. 그리고 1904-1905년에 유럽에 새롭게 등장한 세력 판도는 세력균형 파괴의 촉매제로 작용했고, 이것이 10년후의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귀결되었다.


러시아가 1905년초반의 "봉천(奉天) Mukden"과 쓰시마에서 패전하면서 보잘것 없는 세력으로 전락한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는 의심할 여지없이 2류국가가 되었다. 이 강대국의 몰락이 바로 나폴레옹 시대 이래로 유럽에 존재해왔던 정치적,경제적 균형을 파괴했다. 이렇게 러시아가 기존의 군사 강대국 지위를 상실할 동안, 독일은 군비증강 10개년 계획을 완료했고, 러일전쟁 동안, 유럽 최대의 군사,경제 강대국으로 등장했다.


1905년의 러시아 군사력의 몰락을 이용해서, 독일은 서부 국경쪽의 프랑스에게 전쟁을 위협했다. 러일전쟁을 통해 획득한 독일의 지정학적 이점을 포기할 수 없었고, 1904년의 영불협상을 교란시키고자 했던, 독일 빌헬름2세가 1905년 3월 탕헤르를 방문, 제1차 모로코 위기 (First Moroccan Crisis) 를 도발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빌헬름2세는 프랑스가 보호령으로 삼고자했던 모로코가 독립국이며, 주권국가임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리고 5달 뒤, 카이저는 동쪽 국경의 러시아에 접근해서, 노불동맹을 균열시키려 했고, 1905년 7월 24일,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와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 2세간에 체결된, 뵤르코 조약은 바로 이같은 독일의 대 러시아 접근노력의 일환이었다. [뵤르코 조약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시오. 제목- 뵤르코 조약 treaty of Bjorko  주소- http://kk1234ang.egloos.com/2836973] 하지만 뵤르코 조약은 짜르의 서명에도 불구하고 사문화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러시아의 약속 때문이었다. 조약을 사후적으로 통보받았던 비테와 램스도르프는 조약이 프랑스에 의해 승인되지 않는 이상, 조약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러시아 군사력의 몰락으로, 독일은 9년후의 제1차세계대전 직전보다, 바로 1905년에 서부 국경에서의 성공적인 공격을 전망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가 프랑스를 도울 수 없다고 결론내린, 독일전략가들은 러일전쟁 동안, 프랑스에 대한 선제적 예방 전쟁 ("preventive war")을 계획했다.


슐리펜계획이 완성된 것은 바로 1905년 12월이었다. 독일군의 슐리펜 참모총장이 동부전선을 최소한의 병력으로 방어하고, 독일군의 전력을 서쪽으로 집중, 프랑스군을 급습해서 섬멸시킨다는 내용의 슐리펜 계획을 만든 것은 바로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패배와 1905년 혁명으로부터 크게 약화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904-1905년에 획득한, 유럽 대륙에서의 군사적 패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제1차세계대전 발발의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양국은 러일전쟁을 그들이 군사적 패권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행사할 수 있는 잠깐동안의 기회라고 보았다. 특히 독일은 이같은 패권이 향후 10년동안 점점 약화될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이같이 시간이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는 강박관념이 1914년에 극에 달했고, 이것이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한 전쟁이 불가피하고, 만약 불가피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치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판단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같은 강박관념은 독일군 참모총장 몰트케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잘 드러났다. 몰트케는 1914년 5월 12일, 오스트리아군의 콘라드 참모총장과의 회동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 "더이상 기다리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병력수에 관한한, 우리는 러시아와 경쟁이 되지 않는다."




덧글

  • 뽀도르 2012/04/26 18:22 # 답글

    히틀러도 이차대전 당시 소련이 소국 핀란드에게 쩔쩔매는 것을 보고 러시아 침공의 결심을 굳혔다는 설도 있던데, 일차대전 당시도 비슷한 면이 있었네요. 또한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으로 소련 군사력이 약화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군사력이 약화된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과 흡사하군요.
  • 파리13구 2012/04/26 18:29 #

    네, 독일은 러시아가 약해진 틈을 타서, 프랑스를 혼내줄 구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 명림어수 2012/04/27 00:40 # 삭제 답글

    슐리펜은 자기가 죽은 뒤에
    그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으로 밀고 들어올 정도로
    회복할 줄은 몰랐겠죠.
  • 파리13구 2012/04/27 09:50 #

    아마도 그랬던 듯 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6 대표이글루

2015 대표이글루

2013 대표이글루

2011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방문자

광고

2018 대표이글루_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