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과 영불협상?" 유럽외교사



1902년 1월 30일의 영일동맹은 프랑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러시아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영불양국이 러일 양국과 맺은, 노불동맹과 영일동맹 때문에, 영불이 전쟁에 말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돌입했다.


파쇼다 사건에서 영국에게 굴욕적으로 양보한, 프랑스 외무장관 델카세는 프랑스가 영국과 독일을 동시에 적으로 만드는 사치를 누릴 수 없다고 보았다. 델카세에게 적은 분명했고, 독일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는 영국과의 친선이 필수적이라 보았다.


런던과의 친선을 추진하는 델카세에게 다행히 운이 따랐다. 당시 영국과 독일간의 동맹 협상이 교착상태에 있었고, 독일의 야심찬 해군 증강 사업 추진 때문에, 영국은 독일을 자신의 가장 심각한 대외 위협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프랑스 만큼이나, 아시아 문제 때문에 전쟁에 개입하기를 꺼렸던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영불간의 협상은 1902년 여름에 시작되었다. 1903년, 양국민들 간의 화해가 5월의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파리방문과 6월의 프랑스의 루베 대통령과 델카세 총리의 런던 답방으로 고조되었다.


하지만, 영불협상에 결정적인 자극을 준 것은 1904년 2월 8일,일본이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러일전쟁의 발발이었다. 영국 외무장관 랜스다운에 따르면, 바로 그때부터, 이전까지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던 프랑스 협상단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면서, 협상이 마치 고속열차를 탄듯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1904년 4월 4일, 영불협상이 타결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이를 통해 유럽역사에서 가장 길었던 영불간의 대립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협상이 동맹은 아니었지만, 양국은 중요한 경제,식민지 문제에 대한 타협에 성공했다.


영불협상 체결 소식은 독일에게 가공할 충격을 주었다. 독일은 영불의 적대를 국제관계의 상수로 간주하고 자국의 외교를 수립한 상태였던 것이다. 


델카세의 프랑스 외교는 이미 1900년 12월, 이탈리아와의 각서 교환을 통해, 실질적으로 이탈리아를 3국동맹으로부터 분리해 내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물론 이탈리아는 제1차세계대전에서 삼국협상측으로 참전하기 전까지 명목상 3국동맹 가입국이었다.] 즉  1900년 12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각서를 교환했다. 이를 통해, 이탈리아는 모로코에서의 프랑스 이권을 인정하는 대신, 프랑스는 오스만제국령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타니아에서의 이탈리아의 이권을 인정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1)이탈리아와의 외교적 유대를 강화했고, 2)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이간질시켰으며 3)프랑스의 모로코 획득을 위한 토대를 만들었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삼국동맹으로부터 분리시킨 프랑스의 델카세는 동시에 영국과 러시아의 협상(1907)을 주선함으로써, 영국,프랑스,러시아, 세 강대국을 3국협상으로 묶어놓았다.


3국협상의 성립은 독일에 대한 프랑스 외교의 복수였다. 이는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하에서 철저하게 고립당했던 프랑스가 역으로 독일을 동맹체제에서 고립시킨 것이었다. 이는 적대국에 의한 독일의 포위라는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악몽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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