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가 튀니지로 프랑스를 농락한 방법은?" 유럽외교사

비스마르크,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프랑스 제국주의 - 프랑스의 해외 영토는 프랑스의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쇠락 혹은 열세 劣勢 의 상징이었다>


우선, 비스마르크가 1878년 베를린회의에서 프랑스의 튀니지 점령 권리를 인정한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전에 따르면, 베를린회의란 러시아-터키 전쟁(1877-1878)의 강화조약인 산 스테파노 조약이 지나치게 러시아에게 유리한 것에 불만을 품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독일의 비스마르크의 중개를 통해 베를린에서 1878년 6월 13일부터 7월 13일까지 개최한 국제회의다.


베를린 회의를 통해, 러시아의 일방적인 승리를 인정하고, 발칸에서의 러시아 패권 확립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던 산 스테파노 조약이 수정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러시아 범슬라브주의 운동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무엇보다 러시아는 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취한 정직한 중개자의 태도에 실망과 분노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는 고립되었고, 독일통일과정에서 러시아의 큰 도움을 받은 독일의 비스마르크 조차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번 회의에서 특히,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만족했다. 영국은 동지중해의 사이프러스 점령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 결과, 베를린 회의 이후 양국은 갑자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발칸에서의 세력확장을 위해, 터키와 피를 흘리면서 싸운 러시아는 그 성공의 과실을 열강의 친-터키 개입으로 인해 도둑질 당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반면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어부지리로 세력권을 확장했던 것이다.


베를린 회의에서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가 이후의 튀니지 점령을 묵인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의의 정직한 중개자인 비스마르크가 이를 승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비스마르크의 대 프랑스 정책의 산물이었다. 보불전쟁 승리와 독일통일 이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대 독일 복수감정에 대처해야만 했고, 알자스-로렌 상실로 분노한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 개척하는 것을 지원했다. 이를 통해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관심을 돌려서, 해외진출에 몰두, 알자스-로렌을 잊게 만들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같은 외교적 선물 역시 공짜가 아니었다. 우선 프랑스는 1898년의 파쇼다 사건으로 아프리카 수단에서 영국 제국주의와 충돌했고, 이를 통해 영불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는 영불의 외교적 화해의 걸림돌이었고, 영불화해가 없다면, 프랑스의 대 독일 복수는 외교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정치인들은 비스마르크의 대 프랑스 정책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지도자들은 프랑스가 독일의 지원을 얻어, 해외 영토 확장에 나서는 이익을 누려야 한다고 보았다고 한다. 이같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한 것은 대륙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은 식민정책이 다른 유럽 열강과의 충돌을 유발할 위험이 있고, 이같은 충돌은 유럽에서의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유럽에서의 프랑스 패권의 재확립이 늦어질 뿐이라 주장했다.


1881년, 프랑스의 식민주의자 총리, 쥘 페리 Jules Ferry의 지도하에, 프랑스가 튀니지 정복에 나선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프랑스는 이미 1878년의 베를린회의에서 튀니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인정받은 바 있었다.


그렇다면,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탈리아의 적대감이었다. 프랑스의 튀니지 점령이 이탈리아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탈리아는 튀니지를 자국의 팽창을 위한 자연적인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같은 적대감이 이탈리아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으로 몰아갔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1882년 3국간의 삼국동맹이었다.


3국동맹의 제4조는 다음과 같았다 : "이탈리아가 직접적인 도발을 하지 않았음에도 프랑스의 공격을 받는 경우, 다른 두 나라가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서 이탈리아를 지원한다. 독일이 프랑스의 공격을 받는 경우에도 이탈리아에게 같은 의무가 발생한다."


따라서, 3국동맹은 본질적으로 프랑스를 겨냥한 것이었다. 조약 당사국들은 프랑스 이외의 국가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우호적인 중립의 의무만이 발생하지만, 프랑스가 독일이나 이탈리아를 공격하는 경우는 모든 군사력을 동원한 원조의무가 발생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가 해외 확장을 통해 튀니지 같은 식민지를 획득할 수록,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탈환이라는 대 독일 복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비스마르크의 대 프랑스 정책의 핵심이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주의,해외 팽창은 국가의 힘과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유럽에서의 프랑스의 굴욕 및 이에 대한 심리적 보상을 찾으려는 보상심리를 상징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를 더 많이 획득할 수록, 프랑스의 유럽 대륙 패권 회복 기회는 더 멀어져갔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를 더 많이 획득할 수록, 유럽대륙에서의 독일의 패권은 더욱 공고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덧글

  • Hwoarang 2012/03/21 11:12 # 답글

    일단 이번에 사 둔 '비스마르크 평전'을 읽어봐야 하겠지만 솔직히 비스마르크는 그 냉철한 행동력을 우선으로 둔다 하더라도 정세를 읽는 감각이 거의 천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쩝...
  • 파리13구 2012/03/21 11:35 #

    네, 일독을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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